객원논설위원칼럼
[라이프 칼럼-김다은 소설가/추계예술대 교수]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뉴스종합| 2017-02-14 11:21
“다른 곳은 어떤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여기 지구에서는 모든 것이 풍요로워.”

이번 겨울방학에 발칸지역을 여행했다. 그곳으로 가는 비행기 속에서, 폴란드 노벨 수상작가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집 『충분하다』의 첫 번째 시 ‘여기’를 읽었다. 정말이지 여기 지구에는 참으로 시각적으로 풍요로운 곳이 많았다. 크로아티아 폴리트리비체 국립공원의 얼어버린 폭포 위로 폭설이 뒤덮인 장관, 바다 위에 떠 있는 두브로브니크 성, 슬로베니아의 빙하작용으로 만들어진 블레드 호수와 포스토아니의 종유동굴 등등. 하지만 9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확인하니, 찍은 사진은 30여장에 불과했다. 필자의 모습이 들어있는 것은 열 장 안팎이다. 타인들이 찍어서 보내준 것까지 합친 것이니, 자의로 내 모습을 찍은 것은 서너 장 정도이다. 왜 사진을 찍지 않으세요? 나중에 남는 것이 없잖아요. 동행한 사람들이 물어왔지만 시원하게 대답을 못했다. 소설 자료로 쓰기 위해 작정하고 나선 곳이 아니라면, 여행지에서 풍경을 찍는 경우가 많지 않다.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해서, 사진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

그런 식으로 필자가 사진과 멀어져서 그런지, 한국인들의 카메라에 대한 사랑은 이전보다 더 강해진 듯했다. 새로운 여행지에 도착할 때마다, 일제히 셀카 봉을 꺼내서 하늘에 긴 검처럼 치켜 올리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실제로 많은 이가 눈으로 풍경을 보기도 전에 카메라에 비친 풍경을 따라가며 자신을 담았다. 1인칭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필자의 시선과 달리, 사람들은 셀카를 통해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과 바라보는 자신을 합친, 소설식으로는 1인칭과 3인칭을 합친 형태로 세상을 포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발칸은 터키어로 ‘산’을 의미한다. 버스로 이동시간이 길 때면, 여행가이드가 유고내전 다큐와 KBS에서 방영했던 ‘2차 대전 종전 70주년 기념’ 다큐 시리즈를 차례로 보여주었다. 산들이 높아서 뚜껑이 열린 듯 푸른 하늘만 보이던 발칸 지역의 특이한 지형을 차창으로 언뜻언뜻 보면서, 다민족과 다종교 지역의 분쟁의 역사를 화면으로 따라갔다. 안방에서라면 채널을 돌렸을 먼 나라들의 사건이 그곳에서는 현장처럼 생생하게 다가왔었다.

여행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크로아티아의 해변 가 절벽에 있던 한 카페에서였다. 지나치게 많이 보고 많이 걸은 뒤에 절벽 사이의 빈틈에 놓인 의자에 앉는 순간, 모든 폭력과 투쟁이 가라앉듯 마음에 평화가 찾아들었다. 세상의 가장 편안한 기운을 모아놓은 듯 호수 같은 아드리아 해가 펼쳐져 있었고, 지친 여행자의 머리칼을 바닷바람이 부드럽게 만지고 지나갔다. 차가운 레몬 맥주를 한 모금을 마시며 무심코 중얼거렸다. ‘충분하다!’

절벽의 카페를 내려오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여행이 그러했듯, 이 지구에서의 생의 여정이 끝날 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시인 쉼보르스카는 생전에 차기 시집의 제목을 ‘충분하다’로 정하겠다고 말했는데, 결국 차기 시집이 유고시집인 『충분하다』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목숨을 다하고 이 지구를 떠날 때, 사진처럼 내보여줄 것이 없어도 남이 보기에 객관적인 성과물이 부족해도, 스스로 충족해서 그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여기서 충분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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