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피플 & 스토리] “드라마 ‘사임당-빛의 일기’ 民畵 모두 제 작품”
라이프| 2017-02-24 11:26
드라마 전통화 디렉터로 맹활약 오순경 민화작가…17년전 취미로 민화 시작…첫 개인전시회서 작품완판 작가로 데뷔

17년 전만해도 그냥 ‘아줌마’였다. 집에서 살림하고 아이 키우는 전업주부. 자신의 이름 석 자보다 ‘엄마’와 ‘아내’로 불리던 시간이었다. 17년후 그 ‘아줌마’는 한국의 대표적 ‘민화작가’로 꼽힌다. 최근 방영을 시작한 SBS드라마 ‘사임당-빛의 일기’에 나오는 그림이 전부 그의 작품이다. 민화 작가 오순경(49)의 이야기다. 

▶민화를 만나기까지=민화를 만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오순경 작가는 결혼이 일렀다. 20대 초반부터 살림과 육아에 전념하느라 제대로 된 직업을 꿈꾸지도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가 아파 병원에 입원했는데, 병실에서 봤던 잡지에서 ‘민화’를 만났다. “무작정 민화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아갔다”는 게 오 작가의 설명이다. “민화는 옛 그림을 모사하는게 시초죠. 접근성이 좋은 그림입니다” 처음 시작이 상대적으로 수월해, 금방 빠져들었다. 또 복을 기원하는 길상의 그림이라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자식이 잘 되길 빌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요. 눈으로 보아서 아름다운데다, 복까지 빌어준다니 얼마나 ‘착한’그림입니까” 

그렇게 시작한 민화는 처음엔 ‘취미생활’에 가까웠다.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작업이라는게 또 다른 매력이라, 육아를 하면서도 전념 할 수 있었단다. 민화는 길상의 의미가 강해, 다루는 소재에 따라 그림을 놓는 장소도 달라진다. 예를 들면, 금전운을 상징하는 두꺼비는 현관에, 부부의 정을 상징하는 화초도는 안방에, 서재에는 책가도를 놓는 식이다. 마구잡이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소재의 의미, 음양오행을 따지다보니 공부도 많이 해야했다. “처음엔 쉬워서 시작했는데 하면 할 수록 어렵죠. 가끔은 후회합니다 내가 왜 이걸 시작했을까”(웃음). 취미로 시작했으나 점점 빠져들어 나중엔 제대로 된 종이를 구하기 위해 인간문화재 장인을 만나러 지방에 내려가기도 하고, 공방에서 몇 달씩 기술을 익히기도 했다. 


▶작가 데뷔=공부를 많이하고, 아무리 좋아한다고 취미와 직업은 엄연히 다르다. 전업 ‘작가’ 타이틀을 달게 된데는 숨은 은인이 있었다. 바로 세계 최대 핸드백 ODM(주문자생산제조)업체인 시몬느의 박은관 회장이다. 박 회장은 오 작가의 가능성을 한 눈에 알아봤다. 오 작가는 “집에만 그림 쌓아놓지 말고 전시도 하고 팔라고 적극적으로 조언해 주셨는데, 당시엔 그게 너무 부담스러웠다”고 회상했다. 인사동에 전시장을 대관하고 작품을 채우기까지 천만원 단위의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작가들 중엔 빚내서 전시하는 사람도 있는데, 아마추어인 내가 그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어서 망설였죠.” 

박 회장과 이런 대화를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몬느에서 연락이 왔다. 외국 바이어에게 선물할 부채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었다. “제 작업 중에 부채에 민화를 그린 것이 있었는데, 그걸 눈여겨 보셨던 것 같아요” 다행히 반응도 좋았다. 박 회장은 부채를 선물 받은 사람들이 고국에 돌아가 선물이 마음에 든다고 감사하다는 메일을 받았다며, 알려줬다. “그때 저는 ‘자신감’을 선물 받았던 것 같아요. 10년간 집에서 육아하면서 자존감이 너무 낮아진 상태였는데, 내 작품을 보고 세계 정상급 디자이너들이 좋아했다니 ‘나 그림 잘 하는거 아닌가? 정말 실력이 괜찮은가 봐’ 이런 생각을 하게 됐죠.” 

이후 몇 작업을 더 판매하고 나서, 그 돈으로 2011년 인사동에서 첫 개인전 ‘한국전통회화장식’을 열었다. 전시 작품이 모두 팔려나갔다. 민화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전이라 ‘완판’ 소식은 화제가 됐다. “개인전을 하고 얻은 가장 큰 자산은 바로 ‘자존감의 회복’이었습니다. 내 이름 석자를 걸고 활동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요”

▶드라마 디렉터로 활동=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에 돌입하면서 드라마 소품작업에도 참여하게 됐다. SBS드라마 연애시대, 영화 싸움, 오싹한 연애, 몬스터에 작은 소품을 제작해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민화 작가’로 진가를 발휘하며, 대중에게도 이름을 알린 것은 MBC드라마 마마다. 오 작가는 미술 설치ㆍ감수와 전통화 디렉터 역할을 맡았다. 

주인공인 한승희(송윤아 분)의 직업이 민화작가로, 그가 그린 연화도와 국모란을 비롯 패션쇼에 사용된 패턴까지 모두 오 작가의 작품이다. 드라마용 작품을 제작하는 건 일반 작품제작의 서너배 이상 품이 든다. 완성작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촬영을 위해 같은 작품을 단계별로 끊어서 3~4개씩 그려야하기 때문. 뿐만 아니라 대본에 따라 어제까지 그리던 그림을 버리고 새로 그려야 하는일도 부지기수였다.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때도 많았단다. “시청률 20% 넘으니 말 그대로 ‘민화 붐’이 일었다고 들었어요. 당시 평생교육원, 학습관에서 민화 가르치시던 분들이 수강생이 20배가 늘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갑자기 일어난 민화 ‘붐’에 자신의 그림이 일조했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뿌듯했다고 한다. 

이후 연이 닿은 작품이 현재 방영하고 있는 ‘사임당-빛의 일기’다. “사임당은 마마때와는 또 달랐어요. 일단 작품 수가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많죠. 사임당 그림만 그리는게 아니라, 휘음당 최씨, 이겸의 작업실에 들어가는 그림까지 모두 만들어야하니까요. 중간중간 그림이 불타기도 하고요, 특히 15화 이후부터는 사임당과 휘음당이 그림 베틀을 벌이는데 제작할 때는 정말 작업량이 어마어마 했어요.” 

▶사임당은 불을 품은 천재작가=사임당을 작업하면서는 작가에 대한 공부도 겸했다. 서울미술관, 오죽헌시립박물관, 간송미술관 등 그녀의 그림이 있다는 곳은 다 찾아갔다. “그림을 보면 볼수록 세기의 천재”라는 생각만 들었다. “사임당 작품을 보면 같은 작가로 존경스런 마음이 들 정도로 대단하죠. 필력도 상상을 초월하지만 세심한 관찰력, 대담한 생략, 감각적 붓 터치 모든 면에서 그 이상의 작가가 있을까 싶습니다.”
 
특히 감탄을 금치 못했던 작품은 ‘묵매도(墨梅圖)’다. 눈 내리는 겨울날의 매화를 그린 그림으로 사임당의 대담한 필력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꼽힌다. 전체 24개 중 4개만 남아 전해진다. “채색화보다는 수묵에서 사임당의 천재성이 더 잘 드러나죠. 강조와 생략을 통해 자신만의 그림으로 소화하는데, 사임당의 가슴에 살아있던 ‘불’과 ‘열정’을 만날 수 있죠.” 그는 드라마를 위해 사임당 작품을 모사하면서 그녀의 천재성을 더욱 절감했다고 한다. 

드라마가 끝나는 주엔 전시도 준비됐다. 제작했던 작품들과 최근 작업한 정조능행도를 공개한다. 3월엔 에세이도 출간한다. 민화가 무엇인지, 어떻게 작업하는 것인지,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지 등 일반인들을 위해 민화를 소개하는 책이다. 친구들과, 제자들과 수다떨 듯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만들었다. “민화는 우리 생활이거든요. 집에 놓는 그림이고. 복을 기원하는 그림이고요. 그런데 옛날 것으로 생각하고 그 아름다움을 잘 모르는게 안타깝죠”. 이 부지런한 아줌마의 도전은 늘 ‘현재진행형’ 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한빛 기자 /vick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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