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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부부가 밝힌 ‘12·12 사태’와 ‘장영자 사건’ 재조명
뉴스종합| 2017-03-25 10:10
[헤럴드경제=홍석희 기자]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가 회고록을 내놓으면서 그들이 언급한 역사속 사건들이 재조명 받고 있다. 두 노부부의 주관적 기억에 의존한 기록이라 역사적 사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오는 5월 9일로 예정돼 있는 대통령 선거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는 최근 ‘전두환 표창’ 발언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최규하가 권유? 역사적 사실과 달라= 24일 출간된 이순자의 회고록에는 “최규하 전 대통령이 남편(전두환)에게 후임이 돼 줄 것을 권유했다”고 적시돼 있다. 당시 1979년 10월 26일 ‘10·26사건’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네발의 총알에 맞아 숨지자, 한국은 권력 공백기가 찾아왔고 최규하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임시 수행했지만 권력이 안정적이지 못했다.

불과 두달도 안된 시점인 1979년 12월 12일에 전두환과 노태우 전 대통령 등이 일으킨 군사 반란 사건이 바로 ‘12·12 사태’다.


당시 전두환과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은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연행하고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최규하를 협박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전두환은 10·26 사건의 진상 조사를 위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었으며 군부 내 직책은 보안사령관이었다. 그러나 계엄사령관 정승화와 전두환 사이에는 군 인사 문제를 두고 갈등이 벌어졌으며, 전두환은 정승화를 강제 연행키로 계획했다.

이를 실천키 위해 1979년 11월 중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한 후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 사전 접촉했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이후 전두환은 궁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했고 육군 지휘부를 무력화 했다.

관련 사안의 진행은 최규하 대통령이 모르는 상태에서 진행됐고, 전두환 등 신 군부 세력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총장 연행’을 재가하라고 요구했으나 최규하 대통령은 이에 대한 재가를 거부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했고, 협박과 설득에 결국 최규하 대통령은 정 총장에 대한 강제연행을 재가하기에 이른다.

▶광주민주화 운동의 도화선= 1980년 5월 18일로 기록된 광주민주화운동은 부당하게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집권에 대한 반발 등으로 인해 바로 이듬해에 벌어진 일이다.

이순자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저희 때문에 희생된 분들은 아니지만, 아니 우리 내외도 사실 5·18사태의 억울한 희생자이지만…”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5공 청문회 등을 통해 당시 발표 명령자가 누구냐에 대한 의혹은 여전히 불명확하지만, 당시 정권을 잡고 있었던 측이 전두환이란 측면에서 전두환의 책임이 매우 무겁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최근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전두환 표창’ 발언으로 인해 문 전 대표의 광주지역 여론이 급격히 나빠진 것도 이같은 역사적 맥락 때문이다. ‘전두환 표창’ 발언이 의도적 왜곡과 정치적 해석이란 논란도 있지만 여전히 광주 시민들은 ‘전두환’에 대한 언급 자체만으로도 이를 끔찍히 여기는 정서가 여전한 상태다.

▶장영자 사건은 무엇?= 이순자가 회고록에서 언급한 장영자 사건도 시대를 뒤흔든 떠들썩한 사건이었다. 이순자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지난 1982년 ‘장영자 사건’ 때 혼자 청와대를 떠나 살려고 생각했다”고 기술했다.

‘이철희·장영자 사건’으로도 불리는 장영자 사건은 최고 권력자의 인척이자 유신체제 아래 독재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군림해온 장영자와 그의 남편 이철희가 저지른 희대의 어음사기사건이다. ‘건국 이래 최대의 금융 사기사건’으로도 평가되고, 최근 최순실 사태 이후엔 80년대 벌어진 ‘최순실 사태’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권력형 부정부패 사건의 대명사격으로 기억돼 있기도 하다.

전두환 이순자 부부와 이철희 장영자 부부는 친인척으로 묶여 있다. 장영자는 이순자의 삼촌 이규광의 처제였고, 이철희는 중앙정보부 차장과 유신정우회 의원을 지낸 권력자였다. 유신정우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낙점하는 인사가 국회의원이 되는 제도로 선거로 뽑히는 국회의원과 달리 임기가 절반(2년)이었다. 의원직을 계속 유지키 위해선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충성을 재임 중 확실히 보여야만 공천을 받을 수 있는 국회의원이 유정회 의원이었다.

이철희 장영자 부부가 돈을 번 방법은 자기 자본율이 낮은 건설업체와 접촉해 유리한 조건으로 자금을 제공해주는 대신 담보조로 대여액의 2배에서 9배에 달하는 액수의 어음을 받고 그것을 사채시장에서 할인해 자금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초고리의 ‘어음 다단계’였던 셈이다. 관련 사안이 외부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이·장 부부가 전두환과의 친인척이란 점 덕분이었고, 이때문에 현재까지도 대표적 권력형 부정부패 사건의 대명사로 기록돼 있다.

이 사건으로 공영토건·일신제강 등의 기업들이 도산했다. 조흥은행장·상업은행장은 구속됐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권정달 민정당 사무총장은 경질됐다. 집권 초기부터 정통성과 도덕성을 인정받지 못하던 전두환 정권은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기록돼게 됐다.

이철희·장영자 부부에게는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에 미화 40만 달러, 일화 800만 엔 몰수, 추징금 1억6254만6740원이 선고됐다. 이순자가 “청와대를 떠나려고 했다”는 얘기는 당시 괴로웠던 그의 마음 상태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h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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