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일반
밀양이 키운 하용부 “고고장 많이 갔더니 인간문화재 됐어요"
라이프| 2017-05-24 11:18
인간의 희노애락 담은 춤사위 매료
‘여중군자’소개한 조귀분의 음식디미방
한류원조 아리랑의 진용선식 재해석
김시영의 黑瓷에 담긴 “한국의 茶道”


죽령 어느 길섶의 하찮은 풀도 신병주와 함께 가면, ‘정약용의 형제애가 한국 근세 기술혁신의 시너지를 높였다’는 엄청난 의미를 품게 된다.

이처럼 고을과 역사의 품격ㆍ매력을 키운 명사(名士)와의 동행은 싱싱하고 실감나는 여행을 이끈다.

’뭉쳐야 뜬다(뭉뜬)‘ 처럼 ’지역명사 체험여행‘ 패키지 버스를 탔다. 한국관광공사의 이 패키지 버스는 전주, 당진, 구례, 광양, 하동, 남해, 밀양, 안동, 영양, 강릉, 홍천, 원주, 정선, 평창으로 ‘뭉뜬’ 처럼 재잘거리며 다닌다.



▶밀양 하용부= 먼저 경남 밀양천변 영남루 누각에 당도하면 ’선샤인‘, ’문샤인‘의 고장 밀양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하용부(62) 밀양백중놀이 인간문화재가 기다린다. 백중놀이는 추석 한달전인 음력 7월 15일 소작농과 머슴이 고단함과 울분을 풀어내는 농번기 뒷풀이 축제이다.

용부는 고교때 월담해서 극장 구경 가고 고고장 가던 ‘잘 나가는’ 청소년이었다. 인간문화재를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소년은 40여년이 흐른뒤 “고고장에 많이 가서 춤꾼이 된 모양”고 말해 좌중을 초토화시킨다.

“외국 손님오면 부채춤만 보여주니, 한국이 아주 더운 나라인 줄 압디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철학이고, 대안이요, 풍자요, 개콘이었다.

춤꾼으로서의 삶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1989년 할아버지의 뜻을 좇아 춤을 춰야 겠다는 생각에 그 좋다는 직장 한국전력을 그만두고 어렵게 할아버지의 춤을 고증해 부산 남포동의 가막골소극장에서 첫 공연을 마쳤다. 이때 연극계의 최고봉 이윤택(65)을 만났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가슴 깊은 곳에서 끄집어내는 그의 춤사위에 이윤택이 감동한다. 둘의 만남은 하용부의 예술혼을 문화예술계 최고반열에 올린는 계기가 된다.

그는 퓨전과 응용 안무, 반팔 티 제작을 젊은이들과 함께 했다. 남녀노소 여행자의 환호는 그가 2009년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에서 단독공연할때에도 그랬다. 하용부의 입담이 끝난뒤, 밤에 밀양천에서 보는 영남루의 문샤인 정취는 국내 최고이다.

▶영양 조귀분= ‘군자(君子)’의 호칭은 남성 전유물이 아니다. 궁중-서민-제철-로컬푸드를 공유하고자 했던 영양의 신사임당, 장계향(1598~1680) ‘음식디미방’ 저자에게도 이 호칭이 붙여졌다.

신사임당 못지 않은 식견과 문학가로 ‘여중군자’로 불리던 장계향을 한글저서 ‘음식디미방’으로만 소개하기엔 부족하다고 13대 종부 조귀분(68)씨는 거듭 강조한다. 딸들에게 조차 ‘가져가지 말고 베껴가라’했던 선생의 민중 공유 의식 속에 탄생한 음식디미방은 146가지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다.

성리학과 예문에 조예가 깊었던 여성 인문학자 장계향은 75세 되던 해인 1670년대에 이 책을 내놓았는데, 조귀분 부부가 어르신의 뜻을 계승하겠다는 뜻으로, 그 편한 아파트생활을 청산하고 일찌감치 낙향해 레시피 재연을 시작했다.

영양 두들마을에 가면 조귀분 여사가 이지적이면서도 귀여운 자태로 조근조근 음식만들기 실습을 해준다. “온도를 맞추세요. 조심조심 돌리세요”라는 말 속에 식재료 못지 않게 손맛이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운다. 민속촌 같은 음식디미방 빌리지 ‘두들마을’에는 전통주체험관, 광산문학연구소 등도 둘러볼 수 있다. 하룻밤을 잔다면 정신이 맑아진다.

▶정선 진용선= 리드미컬한 자음 ‘ㄹ’은 서양에서 널리 쓰이는데 또하나의 리드미컬한 자음 ‘ㅇ’은 우랄알타이 어족의 전유물 처럼 널리 쓰인다. 콧소리 입소리 등 ‘ㅇ’을 갖고 다양하게 우리의 감성을 표현한다. 가장 리드미컬하게 희로해락을 풀어내는 ‘ㅇㄹ’의 하나뿐인 조화 ‘아리랑’은 알고보면 ‘한류’의 원조이다.

정선 신동에서 태어난 진용선(54)은 이난영의 ’저고리시스터즈‘ 보다 더 빨리, 더 많은 나라에 한류를 일으킨게 아리랑이라고 믿는다. 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하던 시절 작문시간에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를 번역하면서 독일어권 여러 나라에서 ‘발병’에 걸맞는 어휘를 찾다가 찾다가 못찾고 그 대신 아리랑에 빠져든다. 진용선 아리랑 박물관 관장은 1896년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 박사가 채록해 아리랑을 서양에 알렸고 이후 1930년대초 한국발 노래라는 점을 감추기 위해 일본의 한 ‘복면가왕’이 유행시키고 복면을 벗은뒤 동아시아에 더 유행시킨 것이 아리랑이라는 사실을 고증한다. 녹음기와 사진기, 수첩 하나 달랑 들고 전세계를 누빈 결과물이다.

미국 재즈의 대가는 한국전쟁 위문공연왔다가 화장실이 급해 볼일을 보던중 바깥 한국병사의 아리랑 노랫가락을 듣고 반해, 미국과 유럽에 다시한번 아리랑의 존재를 알린다. 1950년대 초반 아리랑재즈는 맨하탄을 강타했다. 이어 미국, 네널란드 여가수가 미주와 유럽에,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한국인들이 유라시아에 아리랑을 전파했고 진관장은 전했다.

▶홍천 김시영= 홍천에 가면 청자, 백자, 도기, 옹기가 아닌 흑자 도예의 외길 인생을 걸어온 공대출신 삼촌 김시영(59)을 만날 수 있다. 대학 산악부에서 태백산맥 종주 중 화전민터에서 검은 도자 파편을 맞닥뜨리면서 깊고 오묘한 검은색이 그의 가슴과 뇌리에 깊게 박히게 된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 세라믹 부서에 입사해지만 흑자 탐구에 대한 열망으로 사표를 던지고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

김시영의 홍천군 서면 ‘가평요(加平窯)’에 가면 다채로운 빛깔을 내는 김시영 작가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아울러 끊겼던 흑자의 명맥을 다시 잇게된 이유, 흙의 성분과 불의 온도에 따라 다른 빛깔로 태어나는 한국형, 김시영표 도자과학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다. 미술대학을 나온 두 딸은 인문학을 섭렵했다. 그녀들은 퓨전형 작품활동을 하고 손님들에게 흑자 찻잔을 매개로 한 한국형 다도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화목한 네 가족과 막걸리로 담소를 나누니 해가 저문다. 그들과의 이별이 아쉽다.

함영훈 선임기자/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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