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대법원이 권한 초월한 법 해석” 현직 부장판사의 위헌심판 제청
뉴스종합| 2017-05-26 11:17
“‘영업비밀 무혐의’ 판결에
배임죄로 처벌 판례 문제”


일선 재판부가 대법원 판결이 잘못됐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 여부를 가려달라고 제청했다. 대법원이 배임죄 적용범위를 무리하게 넓혀 부당하게 국민을 처벌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일선 재판부가 대법원 판례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려달라고 사건을 헌법재판소로 가져가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인천지법 형사3부(재판장 김동진 부장판사)는 업무상 배임죄를 규정한 형법 355조와 356조 2항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고 26일 밝혔다. 형식상으로는 법률에 대한 위헌 여부를 가려달라고 제청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현행법에는 문제가 없고 대법원 판결이 잘못됐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다.

퇴직근로자가 영업비밀 아닌 자료 활용해도 처벌… 무리한 법 해석? =사안은 이렇다. 한 기계설비 회사에서 일하던 서모 씨는 2008년 회사에서 퇴직하면서 기계설비에 관한 도면 파일을 가지고 나왔다. 서 씨는 이듬해 이전 직장과 같은 업종의 회사를 차렸고, 들고 나온 도면 파일을 활용해 제품 생산에 참고했다. 이전 직장에서는 서 씨를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다. 영업비밀을 무단으로 활용했으니 처벌해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서 씨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해당 도면이 영업비밀이라고 볼 만큼 비밀스러운 문서가 아니어서다. 하지만 검찰은 부정경쟁방지법이 아닌 배임죄로 처벌할 수 있다고 판단해 서 씨를 재판에 넘겼다. 대법원 판례가 영업비밀이 아니라도 ‘영업상 주요 자산’을 퇴직자가 활용하는 행위를 배임죄로 처벌하고 있다는 점이 근거가 됐다. 실제 서 씨는 이 대법원 판결대로 1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 "대법원이 권한을 초월한 법 해석" 강력 비판=항소심 재판부는 이러한 대법원 판결이 사법부의 권한을 넘어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퇴직근로자가 사용한 게 영업비밀이 아니면 죄가 되지 않는데, ‘영업상 주요자산’을 쓰면 배임죄로 처벌하는 무리한 판례를 만들어냈다는 주장이다. 재판부는 결정문에 “사법부는 국회가 제정한 법률을 해석, 적용하는 국가기관이지 영업비밀과 구별되는 아류를 창설할 권한이 없다”고 적었다. 이어 “국회가 회사와 근로자 사이의 미묘한 정보이용 관계를 균형있게 규율해 놓은 것을 사법부가 권한을 초월한 법 해석으로 사법질서를 깨트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재판부는 또 회사가 경력직으로 옮긴 근로자들에 대해 사실상 보복조치를 취하기 영업비밀 침해나 배임죄로 고소하는 일이 빈번한데도, 대법원이 이러한 현상을 돕고 있어 헌법에서 정한 직업선택의 자유와 영업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고도 주장했다.

대법원-헌재 정면충돌 가능성은=이번 위헌 제청을 헌법재판소가 받아들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법조계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현행법상 헌법재판소가 위헌 여부를 가릴 수 있는 대상은 법률이나 국가의 처분에 한정된다. 판결이 잘못됐다고 헌법소원을 내는 ‘재판소원’은 사실상 4심제를 만드는 것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다만 위헌결정이 난 법률을 적용한 재판은 예외적으로 헌법재판소가 위헌여부를 가릴 수 있어 대법원과 헌재가 갈등을 빚은 적이 수차례 있었다. 만약 헌재가 이번 사건을 각하하지 않고 본격적인 심리에 착수한다면 이 사안은 대법원과 헌재의 권한 다툼으로 번질 수 있다. 법원이 판례를 통해 사실상 입법을 한 것이 위헌이라고 보게 된다면 법원의 위상은 크게 저하될 수 있다. 재판장인 김동진(48·사법연수원 25기) 부장판사는 2014년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의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무죄판결한 것이 잘못됐다고 비판했다가 정직처분을 받은 적이 있따. 지난해 고(故)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에서 박근혜 정부가 김 부장판사를 비위법관으로 규정하고 직무배제 방안을 검토한 정황이 나와 논란이 일기도 했다.

좌영길 기자/jyg9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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