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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리포트]“1842일 외침 끝났지만…장애인도 사람답게 사는 세상, 이제 시작”
기사입력 2017-09-06 09:52 작게 크게
- 광화문역 ‘장애인 부양의무제 폐지 농성’ 철거
- ‘마음의 고향’사라져 아쉬운듯 곳곳에서 눈물
- “지금이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아 다행”

[헤럴드경제=정세희 기자] 서울 종로구 광화문역 지하보도에는 온몸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지난 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장애인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외쳤다. 장애등급제ㆍ부양의무제 폐지 광화문 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의 이야기다.

지난 5일 밤 그들의 길었던 여정이 끝났다.

이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5년만에 농성투쟁을 마무리했다. 광화문 지하도에 농성장을 연지 1842일만의 일이다. 농성철거 현장 앞에는 ‘시민 여러분 저희는 9월 5일 이곳을 떠납니다’라고 적힌 플래카드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붐볐다. 

5일 서울 광화문역 지하보도 장애등급제ㆍ부양의무제 폐지 광화문 공동행동 농성장에서 농성철거를 기념하기 위해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


장애여성공감에서 온 조화영(28ㆍ여)씨는 이곳을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소중한 장소였다”고 추억했다.

한바탕의 사진 행사가 끝난 뒤 농성장 뒤켠을 청소하던 공동행동 집행위원인 양유진(30ㆍ여)씨는 썰렁해진 농성장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는 “비가오나 눈이오나 5년간 24시간 지켜온 곳”이라며 “외롭고 소외된 사람들이 연대하는 ‘마음의 고향’같은 곳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아쉽기도 하다”고 씁쓸해했다.

공동행동이 처음 농성을 시작한 것은 2012년 8월. 이들은 장애인을 등급으로 나눠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장애등급제’와 ‘가족들에게 부양의무를 지우는 ‘부양의무제’, 장애인들은 세상과 격리시키는 ‘장애인수용시설’ 폐지를 외쳐왔다. 

농성장이 철거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


지난 5년간 그들의 외침은 공허하기만 했다. 지난 정부 관련부처인 보건복지부 장관과 총리를 만나기 위해 시도해봤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동안 공동행동을 이끌어온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는 “지난 정부에도 장애인등급제 폐지를 약속했지만 오히려 강화됐고 우리는 세금을 축내는 사람으로 낙인찍혀왔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부양의무제가 아직 폐지되진 않았지만 지금이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농성장을 지켜온 공동행동 활동가들은 기나긴 시간을 함께한 만큼 다양한 추억들을 풀어냈다. 김미진(51ㆍ여)씨는 “농성장을 찾아 나가라고 호통을 치는 사람들은 물론 인분을 뿌리는 사람들도 있었다“며 “그때는 많이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곳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연대의 場이자, 시민들과 마음껏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전주에서 온 장윤성(47ㆍ여)씨는 휠체어를 타고 한달에 한번 이곳을 찾았다. 그는 “공장에서 일하며 겨우 자기 앞가림하는 두 딸이 부양의무제 때문에 나를 부양해야 하는 상황이 서글펐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날 광화문 지하철 역 밖 광화문 광장에서는 ‘10년을 견디고 1842일을 견딘 뿌리 깊은 나무처럼’ 문화제가 열렸다. 윤소하 정의당 국회의원, 박래군 인권재단사람 소장 등 주요 인사들이 방문해 축하 발언을 전달했고 축하공연도 이어졌다. 

농성장 철거 현장에 붙여진 응원 메시지들.


하지만 행사를 찾은 400여명의 사람들 중에서 ‘흥겨운 축제의 날’로 여기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지난 5년 간 목숨을 잃은 18명의 영정사진이 대형 스크린에 올라오자 곳곳에서 흐느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농성장을 지키던 공동행동 활동가들은 광화문 농성장이 사라지면 사람들에게 잊혀질까봐 두렵다고 입을 모았다. 행사를 지켜보던 한 활동가는 “이제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위해 한걸음 나아간 것 뿐”이라고 말했다.

공동행동이 주장해오던 부양의무제 폐지와 장애인 등급제 폐지를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지난달 25일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농성장을 찾아 “부양의무제 폐지 등을 논의하는 민관 협의체를 구성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협의체에서 구체적인 대안이 나온다 하더라도 국회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이들이 환히 웃지 못하는 이유다. 

지난 2012년 10월 활동보조인이 없는 시간에 집에 불이나 뇌병변장애 1급인 딸 김주영씨(당시 33살)를 잃었던 박순옥씨가 농성장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행사가 끝난 뒤에도 광화문 지하보도 농성장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농성장이 철거되는 모습을 바라보던 박순옥(65 ㆍ여)씨는 연신 눈물을 훔쳤다. 박씨는 지난 2012년 10월 활동보조인이 없는 시간에 집에 불이나 뇌병변장애 1급인 딸 김주영씨(당시 33살)를 잃었다. 그는 “농성장이 없어지더라도 장애인을 배려하는 제도가 꼭 생겨서 주영이같은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지 않아야 한다”며 “그래서 하늘에서 주영이도 이제는 좋은 세상이 왔다고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sa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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