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다시, 위안부 문제-⑤] 위안부 문제, 공백의 40년
뉴스종합| 2018-01-14 15:23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 가부장적 사회구조 속에서 군위안부를 ‘필요악’이라고 인식했던 한일 양국의 인식은 향후 위안부 문제해결을 지연시켰다. 한국 정부가 짊어져야 할 책임과 일본 정부가 짊어져야 할 책임을 분명히 해야 ‘제 2차 가해’를 최소화한 피해자 중심의 문제해결이 가능하다. 외교영역에서 ‘피해’를 주장하려면 피해사실과 그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우리도 몰랐던 ‘피해’= 위안부 문제 협의과정에서 한국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설명하려면 해방 이후 공론화까지 있었던 40여 년의 공백기간에 대한 얘기가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은 군위안부에 대해 분명 알았다. 일본도 알았다. 1947년 패전직후 일본의 ‘육체문학’ 작가 다무라 다이지로(田村泰次郞)는조선인 위안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춘부전’(春婦傳)을 발표했다.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 하급병사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소설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5년 영화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에서 조연으로 조선인 위안부가 등장했다.

1960년대까지 위안부는 국가가 저지른 전쟁범죄의 피해자로 인식되지 않았다. 일제의 구조적 폭력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정에서 고스란히 답습된 탓이다.한국 정부도 한국전쟁 계기 ‘특수위안대’라는 명으로 위안부 제도를 운영하는 등 위안부의 존재를 전시 ‘필요악’으로 생각하는 인식이 만연했다. 육군본부가 1956년 편찬한 ‘후방전사(인사편)’에 기록된 한국군 위안대는 비록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동원방식이나 운영기간 등에 있어 차이점을 보였지만, 설치 목적이나 운영방식이 매우 유사했다. 
[그래픽=문재연 기자/munjae@heraldcorp.com]

▶1970년대부터 시작된 ‘피해’로서의 위안부 기록= 40년의 공백기간동안 위안부 문제에 대한 논의가 전무했던 건 아니다. 군 위안부 문제를 ‘피해’로 인식하는 시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일본 마이니치 신문의 센다 가코(千田夏光) 기자는 1973년 ‘목소리 없는 여성 8만 명의 고발, 종군위안부’라는 책으로 위안부 제도의 전체상을 조망했다. 하지만 군위안부 문제를 일례로 일본의 국군주의를 고발한 것이지, 전시 여성문제로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본군 위안부를 전시 여성문제로 인식하게 한 작품은 센다 기자가 책을 발간하기 2년 전인 1971년 일본인 위안부 시로타 스즈코(城田すず子)가 쓴 ‘마리아의 찬가’였다. 그는 자신이 채무를 갚으려는 아버지에 의해 일본군에 팔려가 대만과 사이판의 일본군 위안소에서 성노예로 일했다고 했다.

이후 1976년 비평가 김일면 씨가 정신대와 위안부의 개념을 혼용해 ‘천황의 군대와 조선인 위안부’라는 책을 폈다. 일제시대 민족차별 문제를 고발한 이글을 계기로 한국 내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위안부에 대한 논의가 보다 활발해졌다. 1977년엔 오늘날 위증논란의 대상인 요시다 세이지(吉田 清治)가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이라는 책을 발표했고, 1982년 한 강연 자리에서 자신이 군부대를 이끌고 제주도의 마을 등에서 200여명의 여성을 강제로 징병했다고 언급했다. 그의 발언은 1982년 9월 아사히 신문 보도를 통해 세상에 공개됐고, 그 다음해 가해자가 처음으로 위안부 제도의 강제성을 고백한 ‘나의 전쟁범죄’라는 책이 발표됐다.
[그래픽=문재연 기자/munjae@heraldcorp.com]

▶ 기록에서 운동으로, 운동에서 외교문제로 발전한 ‘위안부 문제’= 당시 시로타는 일본 지바현 다테야마시 부녀자 보호시설 ‘가니타 부인의 마을’에서 남은 생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그는 마을의 설립자였던 목사에게 위안부 피해자들의 절규가 잊혀지지 않는다며 진혼비를 세워달라고 간청했다. 가니타 부인의 마을사람들은 스즈코의 호소를 듣고 기부금을 모아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1986년 ‘아, 종군위안부’를 새긴 진혼비를 세웠다. 일본에서 부각된 위안부 관련 시민활동이었다.

하지만 이 활동은 위안부 문제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이때까지 일본 정부는 침묵했다. 

한국 여성단체들이 문제제기에 나서면서 군위안부 문제는 한일 양국에서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한국 여성단체들은 각각 매춘 및 매춘관광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운동은 1980년대 들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 및 일본의 책임규명을 촉구하는 모습으로 발전했다. 1988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와 김혜원, 김신실 등은 일본 후쿠오카와 오키나와에서 ‘정신대’ 실태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때까지 위안부 문제는 아직 한일 ‘외교문제’로 발전하지 않았지만, 일본 군국주의에 의한 여성문제라는 인식은 사회전반에 퍼질 수 있었다.



-다음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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