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이유있는 ‘헛발질’의 미학…배윤환 개인전
라이프| 2018-01-16 17:18
갤러리 바톤, ‘숨쉬는 섬’전…대규모 신작 공개
2018 아트 바젤 홍콩, 필름부문 출품도

[헤럴드경제=이한빛 기자] 가로 8미터 80센치, 세로 2미터 70센치에 달하는 거대한 캔버스(정확히는 캔버스 천)가 벽에 걸렸다. 크기만으로도 압도적이다. 화면을 채운건 정체를 알 수 없는 공동체(혹은 생명체)가 살아가는 곳의 단면이다. 나뭇가지, 계단, 문, 구멍 등이 복잡하게 얽힌 이곳은 밋밋한 면이 하나도 없이 모두 살아서 ‘우글거린다’. 얼굴없는 양봉업자와 무대위 공연을 감상하는 사람들, 돌고 있는 팽이, 뜨거운 커피가 가득한 잔…정신없이 어질러진 이 공간에 자리한 사물들은 하나같이 생명을 얻은듯 꿈틀거리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두고 ‘숨쉬는 섬’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젊은 작가 배윤환(35)이 대규모 신작회화를 공개했다. 서울 압구정동 갤러리 바톤에서다. ‘숨쉬는 섬’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전시에는 4점의 작품이 출품됐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캔버스라는 건 나를 받아들이는 물체다. 작가라는 화자와 작용 - 반작용을 통해 작품이 완성되는데 재미있는 건 그릴 당시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라며 “지겨울 때, 신날 때 신체의 궤적이 다른데 그것이 거울처럼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는 “물활론적(물건에도 생명과 감정이 있다는 이론) 관점까진 아니지만, 작업실에 있으면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다. 물감이 나를 보고 쫄아 있는 느낌이 들때도 있고, 이겨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작업이 나의 흔적을 담아내는 것이라면, 반대로 나를 비추는 생명체란 생각도 든다. 그래서 ‘숨쉬는 섬’이라고 지었다”고 말을 이어갔다.

배윤환, 숨쉬는 섬(Breathing Island),2017, acrylic, oil pastel on canvas, 270×880 cm [사진제공=갤러리바톤]

작가 스스로 ‘아무 생각없이’ ‘손이 가는 대로’ ‘자동으로’ 그린 그림이라 칭했다. 실제로 대상들의 게재방식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작품 오른쪽 맨 위에서 왼쪽으로 이동했다 다시 오른쪽 아래까지 ‘ㄷ’자 형태로 시선이 움직여 보면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본 듯한 느낌도 든다. 작품 곳곳엔 맥락에서 벗어난 재미난 코드들이 숨겨져 있다. 눈 밝은 관객을 위한 작은 선물이다. 휘갈겨 쓴 글씨의 ‘자주 놀러 와’, 도장처럼 찍힌 ‘fumble studio’(헛발질 스투디오) 등 작가의 위트가 빛난다.

“레지던시에서 누군가가 버린 물건을 보고 무언가 작업할 수 있겠다 싶어 정리하고 있는데, 하루는 동료 작가가 제 하는 모양을 보면서 ‘헛발질 한다’고 하는거예요. 그런데 저는 레지던시에선 ‘헛발질’ 해야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젊은 작가 특유의 치기어린 근성이다. “첫 개인전이 2009년 이었으니 근 10년 작업을 하면서 깨달은 건,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작업을 해야한다는 것이예요. 이제야 자신감이 생겼고, 생채기가 쌓이면서 더 단단해 진거죠. 스타작가보다는 내 호흡으로 길게, 담담하게 작품하고 그렇게 기억되고 싶어요” 그 근성이 마냥 치기에만 의한 건 아님이 읽힌다.

“수 없이 그림을 그리는데, 헛발질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죠. 그림을 그리면서 무엇인가 답을 구하는건 아니지만, 언제쯤 프로다운 의식을 가지고 잘하는 작가가 될까 하는 고민은 늘 듭니다” 작품에 숨기듯 그려넣은 ‘jai guru de va om’은 이같은 고민의 흔적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선지자여, 진정한 깨달음을 주소서’라는 의미다. 

배윤환, 물의 행렬(Matrix of water) , 2017, acrylic on wood, 122×160 cm.[사진제공=갤러리바톤]
프로필사진 촬영 의뢰에 뒷모습 촬영을 요청한 배윤환 작가. [사진=헤럴드경제DB]

배윤환 작가는 서원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경원대학교 회화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스페이스몸 미술관, 인사미술공간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챕터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경남도립미술관, 대구미술관, 일민미술관, 소마미술관, 두산갤러리 서울, OCI 미술관 같은 굵직한 기관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베이징 col 아트 스튜디오, 챕터투 레지던시,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에 입주작가로 활동했으며, 청주 신인 미술상 수상, 키아프 참가 등 다양한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젊은 작가의 치열한 고민은 곧 열매를 맺을지도 모르겠다. 갤러리바톤은 배윤환 작가의 영상작품 ‘셀프포트레이트’가 2018 아트바젤홍콩 필름부문에 출품된다고 밝혔다. 갤러리바톤에서의 전시는 1월 27일까지다.

/vick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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