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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더러운 것은 욕망이 아니라 권력이었다
뉴스종합|2018-02-20 11:17

성추행 의혹을 받은 연출가 이윤택은 “더러운 욕망을 억제하지 못했다”고 했다. 틀렸다. 욕망이 그 자체로 더러웠던 적은 없다. 그가 손안에 쥐고 행사한 ‘힘’이 더러웠다. 약자를 먹잇감 삼아 욕망을 충족시키려 했던 그의 ‘권력’이 더러웠을 뿐이다.

문제는 ‘성’(性)이 아니라 순전히, 오로지, ‘권력’이다. ‘#미투’로 상징되는 ‘여성에 대한 성차별 및 성폭력 고발운동’이 문제삼는 것은 남성들의 성윤리 따위가 아니다. 권력에 의해 자행된 ‘폭력’이다.

하지만 ‘착시’는 끈질기다. 흔히 남성들이 모인 자리에서, 심심치 않게 여성들이 가세한 자리에서조차 많은 말들이 오간다. “이럴 때도…?” “저럴 때도…?” 다양한 상황을 가정돼 갑론을박 설왕설래하지만 요지는 한 가지다. “정말 마음에 드는 여성(이성)을 만나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면 그것도 성추행인가?”다. 그 호기심과 답답함은 이해되나, ‘#미투’운동의 핵심은 아니다. 한참 비껴갔다.

혼란은 필부필부의 머리속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배우 카트린 드뇌브와 미술평론가 카트린 미예 등 프랑스의 내로라하는 지식인 여성 100명이 지난달 르몽드에 투고한 ‘성의 자유에 필수불가결한 유혹할 자유를 변호한다’라는 제목의 글이 대표적인 ‘오발탄’이다. 이들은 “성폭력은 분명 범죄지만, 유혹이나 여자의 환심을 사려는 행동은 범죄가 아니다”라고 했다. 이들은 “여성의 무릎을 만지거나 키스를 하려 했다거나 일방적으로 친밀한 메시지를 보냈다는 이유만으로 남성들이 직장에서 쫓겨나는 등 성급한 재단으로 희생자가 양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남자들이 10년, 20년, 30년 전 과거의 죄와 부적절했던 행동들을 끄집어내 뉘우치기를 요구받고 있다”면서 “고발자를 자처한 인물들이 (공인들의) 사생활로 침입해 공개 자백을 강요한다. 이는 사회에 전체주의의 기운을 심어줄 뿐”이라고 했다. 사회적 강자와 약자의 관계를 일반적인 남녀 관계로 치환한 것, ‘권력’을 ‘성윤리’의 문제로 바꾼 것, ‘정치학’을 ‘연애학’으로 대체한 것이 이들의 오류다. 비난이 잇따르자 카트린 드뇌브는 사과했다.

‘#미투’운동은 할리우드의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폭력 행적이 폭로되면서 촉발됐다. 그 물결은 한국에까지 와 닿아 몇 달만에 법조계와 문화계까지 이르렀다. 전세계적으로도 ‘#미투’운동은 확산일로다. 피해 여성들에 의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한가지다. 정치, 경제, 문화계 등의 권력자들이다. ‘제국’의 철옹성세우고 ‘제왕’의 권력을 휘둘렀던 이들이다.

특별히, 한국에서는 거장 시인부터 영화감독ㆍ연출자 등 거론되는 인사들이 군사독재와 권위주의 시대, 국민적 신망을 받았던 이들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부당한 정치권력의 ‘맞은편’, 혹은 그 곁, 또는 그 바깥에서 ‘쌍생아’ 같은 괴물들이 약자들의 ‘열정’과 ‘육신’을 먹이삼아 거대하게 자라나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적폐’는 머리 하나 달린 괴물이 아니라 수많은 대가리를 가진 ‘메두사’일 것이다.

다시 문제는 ‘윤리’가 아니라 ‘권력’이다. 그렇다면 ‘#미투’ 운동의 종착역은 ‘교육’이 아니라 감시와 처벌, 그리고 그것의 ‘제도화’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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