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칼럼
[현장에서]한국판 ‘미투’의 기대와 우려
뉴스종합| 2018-03-07 11:35
1908년 3월 8일. 약 1만5000명의 미국 여성 노동자들이 뉴욕의 루트커스 광장에 모여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열악한 작업장에서 화재로 불타 숨진 여성들을 기리며 궐기했다. 당시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은 먼지 자욱한 현장에서 하루 12~14시간씩 일해야 했지만, 선거권과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후 매년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UN이 지정한 ‘세계 여성의 날’이 됐다.

그로부터 약 110년이 지난 2018년 1월 29일. 서지현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가 ‘성폭력 피해자’라며 한 방송에 출연해 검찰의 성추행 은폐 의혹을 폭로했다. 성폭력 피해자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었기에 그 충격은 컸다.

서지현 검사에서 시작된 ‘한국판 미투(Me Tooㆍ나도 당했다)’ 운동이 겉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

고은, 이윤택, 조민기, 조재현을 비롯해 안희정 충남도지사에 이르기까지 불과 37일 만에 많은 이들의 불편한 민낯이 드러났다

다소 충격적으로 느껴지는 성폭력 범죄가 생각보다 쉽게(?) 세상에 공개된 데에는 서 검사의 미투 고백이 큰 힘이 됐다. “내가 굉장히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했다는 자책감에 괴로움이 컸다”,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것을 얘기해주고 싶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 8년이나 걸렸다”는 서 검사의 말이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큰 울림으로 전달됐다.

최근 서울시도 미투 논란에 휩싸였다. 공무원들이 사용하는 내부망 게시판에 “우리도 미투할까요?”라는 게시물에는 300개 이상의 댓글과 4800회 이상의 댓글이 달렸다. 2014년 성희롱에 시달린 공무원 자살사건도 재조명되고 있다. 당시 가해자들에게 취해진 조치는 감봉 3개월에서 정직 3개월에 그쳤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교통공사 역시 여직원을 성희롱한 간부가 다시 해당 여직원에게 성희롱 교육을 하는 고위직으로 복귀해 논란이 됐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유명인사나 일반인이나 가릴 것 없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수많은 성범죄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쯤되니 ‘이게 진짜 우리나라가 맞나?’하는 생각까지 든다.

한국판 미투는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한 성차별적인 구조의 결과물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기란 참 힘들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는 앞치마를 두르고 집안일을 하는 것은 여성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남자는 씩씩하고 여자는 얌전해야 한다는 고정관념도 교과서에 나와 있다.

결혼을 해서 며느리가 되는 순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며느리라는 이유 만으로 각종 가사일을 떠맡게 된다. 매년 명절 때마다 이혼 건수가 늘어나는 이유다. 맞벌이 부부라고 해도 가사일의 과반 이상은 여전히 여성의 몫이다. 아이 돌보는 일도 상당 부분 엄마에게 책임이 돌아간다.

그러니 자연스레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여성이 늘어난다. 실제로 지난해 우리나라 우리나라 출생아 수는 35만7700명으로 1년 만에 11.9%나 떨어졌다. 이는 1970년 관련 통계 작성 이래 사상 최저치다. 평균 출생아 수도 1.05명으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직장 내 유리천장 지수도 최하위 수준이다. 2016년 기준 500대 기업 임원 가운데 여성의 비율은 2.7%에 불과했다. 전체 기업의 73.2%(366개)는 여성 임원이 단 한명도 없었다.

여성가족부는 올해 처음으로 교과서의 성차별적인 요소를 개선하라고 공식 권고했다. 숨죽이고 있던 성폭력 피해자들도 당당히 얼굴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한국판 미투가 왜곡된 성 문화를 바로잡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미투를 계기로 여성들에게 또 다른 차별이 가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바로 ‘펜스 룰’이다. 펜스 룰은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구설에 오를 행동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아내 외 다른 여성들과 개인적인 교류나 접촉을 하지 않겠다고 한 데서 유래됐다.

벌써부터 일부 직장에서는 ‘성폭력 가능성을 미리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회식이나 출장에서 여성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고 하니 미투에 대한 기대와 함께 우려가 교차한다.

yeonjoo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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