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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봄비
뉴스종합| 2018-03-15 11:18
새벽, 귀가 간지럽다. 누군가 창문을 살짝 두드린다. 똑똑뚝뚝…. 바람이 나무가지에 부딪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수돗물 흐르는 소리 같기도 하다. 새들의 지저귐 같기도 하다. 후르륵톡톡 후르륵톡톡.

잠에서 깨 창문을 여니 봄비가 내린다. 아, 좋다. 빗소리만으로 좋다. 추적추적 봄비가 정신을 맑게 해준다. 봄비, 그러고보면 참 추억도 많다. 거실에 앉아 옛일을 회상한다.

학창시절 얘기다.

“이 비 그치면 /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겄다” - 이수복 시인의 ‘봄비’.

나비 넥타이 맨 선생님은 이 시구를 읊조리고 또 읊조리셨다. 눈을 지긋이 감으며 읽어주고 또 읽어주셨다. 이 시 앞에서 선생님은 수업 진도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셨나보다. 시 읽어주시다가 옛날 얘기에 빠지셨고, 몇 문장 또 읊조리다가 다시 옛 생각을 떠올렸다. 단어 하나하나를 꼭꼭 씹어드시려는 듯, ‘비’, ‘강나루’, ‘언덕’ 등에 대해 수많은 의미를 부여하다보니 책장 다음 페이지는 좀처럼 넘어가지 않았다. 아, ‘서러운 풀빛’이란 구절 앞에선 시인이 왜 풀빛을 서럽다고 표현했을까 라는 물음으로 한시간 내내 이 얘기만 하신 것 같다. 시에 담긴 유사한 통사구조, 멋드러진 운율 설명만해도 두어시간 족히 할애하신 듯 하다. 그러다보니 이수복의 봄비를 일주일 내내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지겨웠고, 졸음만 쏟아졌고, ‘이 선생님 수업 날로 먹는구나’라고만 생각했는데 지나고난뒤 깨달았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삶의 여유와 감성, 낭만, 순수를 가르치신 거라고. 짧은 지식 하나 보다 인생이란 큰 그림을 가르쳐주신 거라고. 그랬기에 봄비에 대한 추억은 내겐 자꾸 자꾸 꺼내보고 싶은 사진 앨범이기도 하다.

출근 길, 이런 생각도 든다. 이번 봄비는 특히 반갑다. 지난 겨울 너무 추웠다. 혹독한 추위였다. 내 개인적으로도 이렇게까지 추웠던 겨울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급하강한 수은주 외에도 편치 못한 심리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추위를 버티느라 이를 악물었다. 한달내내 롱패딩을 벗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반갑다. 제주 등 일부지역에선 봄비를 넘어 호우주의보가 발효됐다고 하니 비 피해는 없었으면 좋겠다.

전국 대지가 촉촉해지면서 정말 ‘봄비’ 시 처럼 이 비 그치면 완연한 봄이 터를 잡을 것이다. 개나리ㆍ진달래가 활짝 웃고, 목련은 꽃망울을 터뜨리고, 벚꽃향은 또 전국을 진동시킬 것이다.

계절적 봄비는 왔지만, 심리적 봄비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점은 아쉽다.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과 여전한후폭풍, 급박하게 돌아가는 한반도 정세,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검찰 소환, 특히 불길처럼 번지는 미투(Me Too) 등 각종 사회적 이슈는 우리 마음에 봄기운을 장착할 여유를 전혀 주지 않고 있다. 모든 갈등, 논쟁을 봄기운이 잠재워줬으면 하는 바람은 일종의 회피일까.

어쨌든 봄비 오는 날, 세상이 시끄러워 노래방엔 못가는 대신 하루종일 봄비 노래나 불러야 겠다. 아니, 당장 맘 속으로 봄비를 꺼내본다.

“봄비 속에 떠난 사람 봄비 맞으며 돌아왔네~~~”(이은하 봄비)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언제까지 나리려나~마음마저 울려주네 봄비~~~”(박인수 봄비)

ys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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