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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성폭력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선
뉴스종합|2018-03-19 11:28

얼마전 영화 ‘은마는 오지 않는다’의 작가로 잘 알려진 안정효의 ‘세월의 설거지’란 자서전을 읽으며 한 대목에 붙들린 적이 있다.

공덕동에서 산 어린시절 얘기로,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에 어머니와 자신이 힘들어한 얘기다.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는 자주 가출했고, 그 역시 몇 차례 가출해 시장바닥 판대기 위에서 며칠 밤을 자기도 했다.

그 시절, 그런 일이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라해도 희수의 나이에 한 작가의 내밀한 고백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소설에는 일정부분 작가의 경험이 들어가게 마련이지만 그와 달리 어느 시기가 되면 오롯이 작가자신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써야 할 때가 오는 듯하다. 그런 때란 말할 수 없는 것도 다 말할 수 있게 되는 때일 것이다. 또한 그 때란 그 말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일정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됐거나 반대로 갈수록 기억이 생생해져 견딜 수 없는 때일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일은 무덤까지 갖고 가자는 말을 하지만 그런 일은 여간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해야 할 말, 말이 돼어야만 하는 말은 반드시 쏟아내야 한다는 건 단지 우화 속 얘기가 아니다. 그렇지 못한 경우 죽음에까지 이르는 병이 된다. 최근 세계적인 미투운동과 함께 출간된 성폭력 피해자들의 증언을 보면, 말로 표현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페미니즘 열풍을 몰고 온 작가 록산 게이는 몸무게가 200kg가까이 나가는 거구다. 그런 그녀가 10대엔 날씬하고 매력적인 몸을가졌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초원의 집’의 주인공처럼 아름다운 사랑을 꿈꿨던 10대의 소녀는 또래의 친구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만다. 기신기신 집에 돌아온 뒤 그녀가 한 일은 평소의 착한 딸 노릇이었다. 학교에선 가해자들이 지어낸 추문으로 2차 피해까지 입어야 했다. 무언가 말을 해야 했지만 아무도 귀담아들어줄 것 같지 않았던 그녀는 끊임없이 먹어대는 일로 스스로를 학대하게 된다.

하버드대 출신의 영화제작자 위니 리의 얘기도 비슷한 데가 있다. 10년 전 북아일랜드를 하이킹하다 그녀는 10대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다 큰 어른이 어떻게 10대에게 당하냐는 말은 폭력적 상황에선 통하지 않는 듯하다. 그 일을 당하고 온 정신을 붙들어 의식을 집중한 건, 말로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상황에서 그녀는 겨우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강간을 당했다”는 말을 토해낸다. 그 말이 그녀를 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구들의 위로와 공감으로 그녀는 마음의 감옥에 갇히지 않고 사회로 눈을 돌리게 된다.

최근 국내 미투운동에서 피해자들의 증언과 함께 2차 피해가 확산되면서 피해자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사태에 까지 이르렀다.

오래된 일을 왜 끄집어내냐며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이들도 있지만 피해자들은 그 기억에 붙들려 순간 순간 고통받는다. 말해지기어려운 것을 말한 건 무엇보다 피해자들에게 희망적이다. 그 다음은 말해진 것의 본질을 우리가 바로 보는 것이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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