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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이 역모를 꿈꿨다고?…시화 즐긴 문인이자 예술가였다
라이프|2018-04-13 11:35
‘야심가인가, 희생자인가’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을 둘러싼 세상의 시각은 엇갈린다.

수양대군에게 ‘역모’로 몰려 처형당한 안평과 예술가로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이상을 꿈꾸었던 안평 사이의 거리는 멀다.

20년전, 안평대군의 삶을 추적해 그의 예술혼과 정신세계를 한 권의 책으로 내놓겠다고 작정했던 심경호 고려대 교수 역시 이 의문에서 시작했다.


‘단종실록’에는 안평대군이 역모의 뜻을 품은 것처럼 보이는 시들이 실려 있다. 예컨대 ‘어느 때나 햇빛이 커져서/ 밝고 밝게 사방에 비칠꼬’라는 안평대군의 시는 자신을 태양에 비유한 것으로 읽힐 소지가 있다.

그런가하면 안평은 세종으로부터 보옥을 하사받고 스스로 ‘낭간거사’란 호를 지었다. 거사(居士)란 ‘정치의 장을 떠난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 정치적으로 큰 야심이 없었다는 얘기다.

심 교수는 “계유정난의 경과를 서술하는 단종실록의 기록은 날조물의 집적”이라며 “단종실록 편수자들은 국정과 관련 없는 안평대군의 언행을 날짜에 맞춰 안배하고, 악의적인 인물 평가를 부기했다”고 주장한다.

심 교수는 안평대군의 시문을 모으고 시문을 헌정한 이들의 글을 되읽으면서, 정치와 예술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학과 예술 모임 자체가 권력행위로 간주됐던 시대, 국왕의 아들이면서 지성의 모임을 주도했던 안평대군의 행위는 그 목적과 상관없이 정치적이었고 권력의 현시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임이 근대에서도 정치행위로 여겨진 터에, 당시로선 더 더욱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안평은 세종이 추진하는 각종 국가사업에서 큰 역할을 했다. 훈민정음 창제, ‘동국정운’ ‘용비어천가’ 등 정음 문헌의 편찬에서 그의 역할은 크다. 20대에엔 시학에서 일정한 경지에 이르렀다. 문인과 지식인들이 안평 주위에 모이는건 당연하다. 1447년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는 그 결정체라 할 만하다. 안평은 도원에서 노니는 꿈을 꾼 뒤 안견에게 몽유의 인상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스스로 ‘도원기’를 지었으며, 그 이후 ‘도원도’와 ‘도원기’에 문신들이 시문과 부로 장식하게 했다. 안평의 이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심 교수는 안평대군의 비극을 그의 탁월함에서 찾는다. 바꿔말하면 수양대군의 열등감이다.

특히 한시를 자유자재로 짓는 안평에 수양대군은 열등감을 느꼈으며 동생을 죽이는 주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한시의 격차는 문학의 중흥기에 매우 뼈아픈 결함이었다.

심 교수가 20년 만에 스스로의 약속을 지켜 펴낸 1200쪽에 달하는 평전 ‘안평’(알마)은 한 인간을 이해하려는 저자의 애정어린 탐색과 세심한 눈길, 시대의 좌표 위에서 읽어내려는 균형감을 보여준다. 저자는 “안평대군의 35년간 삶을 꿈속에 노닒, 즉 ‘몽유’(夢遊)라고 규정해도 좋으리라. 그 꿈은 질척질척하여 깨어난 뒤 뒷맛이 씁쓸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청백하여 차라리 쓸쓸하기까지 한 그런 꿈이었다.”고 정리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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