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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 즐긴 조선시대…성균관에 소 도축장 있었다
라이프| 2018-04-13 11:33
20세기 말 한국인 섭취량보다 많아
영조때 명절이면 2만~3만마리 도축
나라에서 ‘우금령’내려도 즐겨 먹어
여러부위 즐긴 연산, 일상음식 첫 전교


조선시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가 소고기였고, 1인당 섭취량이 20세기 말에 한국인들이 섭취한 양보다 많았다.

조선시대 소고기 열풍은 요즘으로 치면, ‘치맥’열풍과 같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흔히 굶주리고 못먹었다고 여기지만 소고기를 즐기는 문화가 일상화돼 있었다.

“귀신에게 제시하고, 또 손님을 대접하는 데 쓰거나 먹기 위해 끊임없이 소를 잡는데, 1년 동안 잡은 소가 수천 마리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있다.

역사학자 김동진 씨는 저서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위즈덤하우스)에서 “인구가 1500만 명이던 17세기 후반에도 하루에 1000여 마리씩 도살됐다는 기록이 있다, 나라에서 우금령을 수시로 내려 단속했지만 조선인의 소고기 사랑은 그칠 줄 몰랐다”고 말한다. 

“소고기의 뛰어난 맛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고, 누군가의 마음을 얻으려 하는 이들은 언제나 소고기로 잔치를 열고, 소고기를 선물로 바쳤다. 그러면 바로 효력을 볼 수 있었다. 때로 적발되면 이는 피할 수 없는 뇌물의 증거가 되었다”‘(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에서)

당시 제삿상에는 반드시 소고기를 올렸고, 설, 단오, 동지 등 명절마다 소를 잡았다. 영조 51년(1775)에는 명절에 도축한 소가 2만에서 3만 마리에 이르렀다.

소고기 소비가 이렇게 많은 것은 소 사육수가 그만큼 많았다는 의미다. 이는 나라에서 소 사육을 장려한 농우증식정책의 결과로, 국가가 직접 목장이나 사축서를 운영하고, 민간에서 소를 사육하면 국역을 감면하거나 면제해줬다.

소고기는 조선시대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임금은 반드시 소고기를 먹었다. 소고기는 국왕의 품격을 상징했기에 왕위를 찬탈하려고 모의하는 반역자들은 식탁에 반드시 소고기를 올렸다. 나라의 허락없이 소고기를 먹는 자는 왕위 찬탈을 모의하는 반역자로 여겨진 건 이런 이유다. 명종 때 사람인 박세번이란 이는 왕이 즉위한 초기, 사직동에 사는 무인들과 작당하고 소를 잡았다가 ‘반역의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처단됐다. 조선 전기의 무신 남이는 병약한 몸을 보하기 위해 소고기를 먹다가 국상 중이라는 이유로 체포당하기도 했다. 그의 집 부엌에는 소고기 수십근이 있었다고 전한다,

소고기를 가장 많이 즐긴 이들은 양반 사대부가였다. 하고 많은 잔치때마다 언제나 소고기를 사용했다. 그러다보니 “소 잡기를 닭 잡듯이 한다”라는 비판이 나왔다. 대사헌이었던 허지는 “신이 항상 형장 100대에 해당하는 죄를 범합니다”고 했다,

조선시대 엘리트 집단인 성균관 유생들에게도 소고기는 빠질 수 없는 먹거리였다. 유생들은 공부로 지친 몸을 소고기로 달랬고, 나라에서도 그들이 소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서울 도성내에 유일하게 소 도축을 허가한 장소가 바로 성균관이었다. 유생에게 제공하고 남은 소고기는 현방이라는 소고기 판매시장을 통해 일반에게 판매됐다, 이렇게 판매된 소고기는 성균관 유생들을 뒷바라지하고 국가기관을 운영하는 비용으로 쓰였다.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는데도 소고기는 쓰였다.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군사들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과 기운을 되찾아 주는데 소고기만한 게 없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숙종2년 주기적으로 소고기를 먹이는 호궤 대상이 된 군졸은 1만 3000여명이었고 호궤에 쓰인 소는 서른두 마리였다. 당시 군졸 한 명당 0.81kg이 제공됐다. 요즘 고기 1인분이 150~200g임을 감안하면 양을 알 만하다. 영조 때엔 이 보다 더 많이 지급됐다.


소 사육이 늘고 소고기 식용이 일상화되면서 부위별로 소고기를 사용하는 법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특히 연산군은 소고기의 다양한 부위를 먹은 인물로 이름을 날렸는데, 지라와 콩팥을 각 한 부씩 사용하고 우심적이라 부르는 심장을 구워먹거나 육즙을 내 먹었다. 다양한 부위를 즐길 줄 알았던 연산군은 소고기를 제사에 바치는 음식 뿐 아니라 일상 음식으로 먹는 것이 좋다는 전교를 내린 첫 번째 왕이 됐다.

소의 흑역사는 병자호란 전후로 발생한 우역을 꼽을 수 있다. 심양에서 조선으로 전파된 우역은 독성이 매우 강하고 전염이 잘 돼 병에 걸리면 90퍼센트 이상 죽었다. 사람들은 공포를 느끼고 우역이 발생했다는 소문만으로 소 기르기를 포기하고 도축한 뒤 소고기 잔치를 벌였다. 병에 걸려 죽이느니 건강할 때 잡아 몸보신을 하자는 의도였다, 심지어 우역이 지나간 후 살아남은 소들도 죽였다.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에게 마지막 먹을거리 역시 소였기 때문이다.

농업의 근간으로 신성시된 소와 탐닉의 대상이었던 소, 조선인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던 소와 소고기의 흥미로운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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