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칼럼-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리틀 포레스트’를 꿈꾸게 된 사회
기사입력 2018-04-17 11:20 작게 크게

<리틀 포레스트>는 도시생활에 지쳐 고향집으로 내려온 혜원(김태리)이 그 곳에서 살아가는 일상을 담은 영화다. 특별한 이야기라고 해봐야 고향 친구들인 재하(류준열), 은숙(진기주)과 함께 한 끼 밥을 해먹거나 술을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다. 그것보다 더 흥미진진한 건 혜원이 하루하루 그 곳에서 철마다 나는 식재료들을 가져다 해먹는 음식들이다. 봄이면 지천으로 자라나는 쑥을 캐다 음식을 해먹고, 여름이면 콩을 갈아 콩국수를, 가을이면 감을 매달아 곶감을 만들고, 겨울이면 뜨끈한 수제비와 배추전을 해먹는다. 마치 먹방을 보는 듯 하지만 이 영화의 영상이 달래주는 건 식욕이 아니라 마음의 허기다. 자연이라는 대지모가 재료를 준비해주고 엄마가 알려줬던 레시피의 기억들이 차려주는 그 음식들을 먹다보면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도시에서는 깜박 잊고 있었던 그 사실을. 도시인들의 허기가 남달랐던 탓인지 이 소박하고 작은 영화는 무려 150만 명이 관람했다.

최근 새로 시작한 나영석 PD의 예능 프로그램 <숲 속의 작은집>은 제목처럼 숲 속에 작은 집 한 채를 지어놓고 그 안에서 생활하는 며칠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 공공수도와 공공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고, 무엇보다 숲 속에 고립되어 있는 곳이라 특별한 일이라는 것이 애초에 벌어질 리가 없다. 그저 조용히 멍한 채 시간을 보내거나, 책을 읽고, 소박한 한 끼를 해먹으며 산책을 나서는 정도가 이 곳에서의 생활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단조로운 삶이 시선을 잡아 끈다. 도시생활의 관점으로 보면 단조롭게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즐거움들이 새록새록 생겨난다. 조용해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소리를 듣는 일과, 밤하늘을 가득 메운 별들을 바라보는 일, 또 비 오는 날 산책길에 우연히 풀잎 위에서 빛나는 빗방울들을 발견하는 일 같은 것들이 모두 새로운 즐거움으로 채워진다. 사실 다큐에 가깝고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아 심심살 수밖에 없는 이 프로그램은 놀랍게도 3% 이상의 적지 않은 시청률을 냈다. 무엇이 이 심심함을 자꾸만 보게 만든 걸까.

개발시대부터 이어져온 성장주의 시대의 막연한 낙관들은 IMF 이후 터져버린 거품들로 인해 조금씩 고개를 숙였다. 그 때 성공한 삶의 기준이란 좋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취직하고 좋은 집안의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 기준 자체가 달라졌다.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한 성공을 꿈꾸기보다는 이제 손에 잡히는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나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이 이제 새로운 가치 있는 삶의 기준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 물론 이렇게 달라진 삶의 가치 기준은 노력한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현실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마치 패배자와 포기자의 정서가 깔려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간 큰 성공을 향해 달려오던 우리네 삶이 가져온 만만찮은 부작용을 떠올려보면 바람직한 가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의 벤처투자가 로저 맥나미는 2008년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인해 생긴 경제 침체 기간에 생겨난 새로운 경제적 기준들을 ‘뉴 노멀(New Normal)’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 바 있다. 즉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리틀 포레스트’를 꿈꾸는 사회가 보여주는 건 우리 시대의 새로운 기준이다. 작아도 확실하게 손에 잡히는 행복. 그것이 우리 시대의 ‘뉴 노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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