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보리 섬’ 가파도, 예술 옷으로 갈아입다
기사입력 2018-04-17 11:27 작게 크게
현대카드 ‘가파도프로젝트’ 재능기부 공헌
‘납작섬’ 더 아름답게 지키기 위한 ‘변화’ 시작
MoMA·테이트모던 추천 예술인 창작 기지화
옛길 복원 등 도시재생 통해 문화공간 탈바꿈
제주 남쪽 푸른 파도와 연둣빛 청보리 물결이 서로 ‘밀당’하는 가파도가 180만년 간 묵묵히 지켜봐주던 한라산과 산방산을 쳐다보며 대차게 웃었다.

여의도의 1/3 크기(84만㎡)에 불과한 가파도에 한국, 미국, 영국 최고 예술기관이 추천한 예술가들이 찾아들었다. 가파도의 매력에 빠진 예술가들이 “집과 창작터를 줄테니, 맘껏 예술혼을 불살라 보라”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가파도는 ‘더 아름답게 지키기 위한 변화’를 시작했다. “본섬 보다 더 세질 지 모른다”는 결기가 예사롭지 않다.

대정읍 모슬포항에서 여객선을 타고 가파도에 도달하는 시간은 15분쯤인데, 도착하기 3~4분전까지 섬은 보이지 않는다. 최고해발 20m, 접시를 엎어놓은 듯 하기에 가까이 가서야 납작한 섬에 납작한 집들이 붙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납작섬, 납작한 재생, 최고의 꿈=가오리(제주 방언 ‘가파리’) 처럼 생긴 섬의 해안선 4.2㎞에 올레길이 휘감고, 배가 닿는 상동과 마라도쪽 하동 사이엔 섬을 관통하는 가파로 67번길이 나있다. 휠체어, 자전거, 유모차가 모두 다닐 수 있는 무장애 길이다. 길과 집을 빼면 온통 청보리밭이다. 청보리 파도가 북으로 치면, 바다 물결은 산방산으로 도망하는 듯하고, 남으로 치면 바다가 이어받아 동생 마라도에 청보리향을 전하는 듯, 아름답게 ‘밀당’한다.

보리밭 사잇길로 들어서면 모두가 동심이 된다. ‘꺄르르’ 처녀들의 웃음소리, 모녀여행자와 계모임 이모들의 재잘거림 사이로 청보리 축제(4.14~5.14)의 풍악소리도 들린다.

배에서 내릴 때부터 뭔가 달랐다. 선착장에는 납작하고 길죽한 여객선 터미널이 섬의 자태와 튀지 않는 모습으로 주민과 여행자의 안식처로 자리잡았다.

섬 남동쪽 잠수함 잠망경 같은 건물 ‘가파도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AiR)’가 귀엽게 솟아나 풍력발전기와 마주보고 있었고, 스낵바 & 아카이브룸, 버려진 집들을 활용한 가파도하우스(펜션) 6개동과 키친, 어업센터 & 레스토랑이 마치 오래전 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 처럼 소박하지만 세련된 모습으로 슬그머니 옛집들과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제주특별자치도가 집과 터를 매입하고 현대카드가 사회공헌 재능기부로 리모델링한 ‘가파도프로젝트’의 1단계 모습이다. 상업시설의 운영은 주민조합이 맡아 이득을 나눠갖게 된다. 떠나면 그만이던 젊은이들의 회귀 본능을 자극할 것 같다.

MoMA, 테이트모던, 그들이 왔다=제주도 본섬 보다 잘 될 것이라는 당찬 꿈은 ‘AiR’에 있다. 가파도에 매료된 부인 손에 끌려 이곳에 왔다가 “여기서 뭔가 하자”고 결심한 현대카드 정태영 부회장과 스태프들, 최욱 원오원 건축사무소 대표는 머리를 맞대고 세계 최고 예술기관을 통해 최고의 예술가를 가파도에 살게하자는 당찬 플랜을 만들었다.

메디치의 후원으로 몰려든 피렌체 예술가들이 르네상스로 문명을 바꾸었으며, 아를에 고흐를, 생폴드방스에 샤갈을, 니스에 마티스를 빼앗긴 파리가 예술 파워의 상당 부분과 세계적 여행지로서의 인기를 남프랑스와 나눌 수 밖에 없는 점은 문화예술이 공동체 재생과 번영에 상상못할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예술을 매개로 한 현대 도시재생 대명사는 화력발전소가 상전벽해, 천지개벽한 영국 런던의 테이트모던이다. 많은 이들이 현대미술의 최고봉으로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AiR’에 모인 제인, 루이스 윌슨 자매, 엘리아나 빌도소, 요한 올린, 아무 송, 정소영, 미디어 아티스트 양아치 등은 뉴욕현대미술관, 테이트모던, 우리의 국립현대미술관의 권위있는 간택과 가파도 직-간접 체험, 최종 자기 결정을 통해 가파도에 살기로 작정한 예술가들이다.

정 부회장은 “가장 강력한 테이트모던과 모마가 하나의 프로젝트에 흔쾌히 나선 전례는 아시아에서 없는 것 같다”면서 “가파도라는 낯선 곳에서의 삶을 선택해주신 예술인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마르티노 스티어리 MoMA 큐레이터와 함께 지난 12일 가파도 프로젝트 개막식에 참석한 이숙경 테이트모던 큐레이터는 “가파도 프로젝트 때문에 한국에 대한 세계미술계 관심이 높아진 듯 하다”면서 “가파도에서 작품을 내면, 세계적인 것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사진 위부터 테이트모던, MoMA 등 최고 예술가들을 가파도에 초빙하고 친환경 섬 재생프로젝트를 추진한 배경을 설명하고 있는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 아티스트레지던스 AiR’, 가파도 아티스트들의 브레인스토밍 모습.


제주의 광장, 옛길 속속 복원=북쪽에선 제주의 상징 용두암과 제주 탄생 성지 삼성혈이 크게 웃었다. 용두암에서 삼성혈에 이르는 가장 제주다운 곳 ‘원도심’은 제주답지 않게 변한 것을 제주답게 바꾸는 도시재생이 한창이다. 제주목관아, 관덕정, 칠성로, 산지천 빨래터, 삼성혈, 신산공원, 제주성(城), 구명골, 동목골, 검정목골, 동문ㆍ서문 시장 일대 옛것은 복원되고 수십년 아무렇게나 손때 묻은 곳은 문화의 거리, 거리갤러리 등으로 탈바꿈한다.

국토의 최남단을 지키는 군사 훈련장으로 마련된 관덕정은 제주 행정-군사의 중심 제주목 관아 앞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일대에 관덕정 광장이 조성된다. 관덕정을 중심으로 이어져 왔던 광장 문화를 복원하자는 유홍준 석좌교수 등 전문가와 향토사학자들의 제안에 따른 것이다. 수문장 교대의식, 탐라 순력행차와 다양한 역사문화 행사가 펼쳐지게 된다.

제주목관아 인근 골목길 구명골은 도심 올레 스토리를 해설사들이 전하고 안내 하는 옛길로 복원되고 거리갤러리가 생긴다. 칠성로에는 청년 창업과 문화예술 창작을 위한 도시재생 상생마당이라는 멍석이 깔린다. 인근엔 옛 기억 저장공간(아카이브)과 전시 공연장이 들어선다.

지금도 제주 원도심에 가면, 제주의 깊은 정서를 느끼고 문화유적을 감상할 곳이 참 많다. 대다수 제주 여행자들이 레저에 치우쳐 있는 점은 아쉽다.

원도심이 품은 제주의 깊고 푸른 정서=관덕정은 세종대왕의 국방의지가 발현된 곳, ‘이재수의 난’ 중심지, ‘4.3’을 촉발시킨 3.1절 발포 진원지 등 숱한 영욕이 교차했다. 제주도에서 가장 멋진 곳이라는 뜻의 탐라형승(耽羅形勝) 행서체 글귀는 멍든 역사를 묻어둔채 우람한 자태를 대변한다.

제주목 관아는 제주의 자존심이다. 일제때 크게 훼손되자 전문가의 고증, 도민들의 헌와(獻瓦) 운동이 어우러져 말끔하게 복원됐다. 연회장 우연당 앞엔 연못이 있고, 임금이 계신곳을 향해 고마움을 표시하는 망경루는 탁 트신 조망을 제공해 초소 역할도 겸했다. 시문과 취미를 나누는 귤림당에서부터 관아 심부름꾼의 처소 통인방까지 꼼꼼하게 복원했다. 이형상 목사의 특이한 관상은 조선후기의 천재 윤두서 초상 만큼이나 눈길이 오래 머문다.

한라산 관음사 근처에서 발원해 제주의 센트럴파크인 삼성혈-신상공원, 동문시장을 지나 제주항으로 흐르는 산지천은 예전 빨래터였다. 2002년 자연형 하천으로 복원되고, 아치형 다리가 놓여 운치를 더하더니 최근들어 문화 예술 축제, 길거리 콘서트의 무대가 됐다.

삼성혈과 신상공원은 우람한 거목과 아기자기한 화초 수목, 숲속 공연장 등이 두루 갖춰진 필수방문지이다. 육지와는 다른 모양새의 제주성지, 다섯 명의 현인을 기리는 오현단,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등이 있다. 멀어야 버스 네댓 정거장으로 도보여행이 좋다.

세계적인 스타를 꿈꾸는 가파도, 원도심과 핑크빛 철쭉 꽃망울이 맺힌 한라산은 렌트카 요란한 제주 다른 곳과는 달리 ‘걷는’ 여행이라 참 좋다.

함영훈 여행선임기자/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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