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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명품사랑 뿌리…18~19세기 서울양반의 별난 취향?
라이프| 2018-07-20 11:10
천원짜리 지폐에 들어있는 이황의 초상화는 1974년 이유태씨가 그린 것으로 복건 차림이다. 복건은 검은 헝겊으로 위는 둥글고 삐죽하게 만들고, 뒤에는 넓고 긴 자락을 늘어지게 대며, 양옆에는 끈이 있어서 뒤로 돌려 매게 한 남자용 쓰개다.

그런데 이황의 문하인 김취려가 복권과 심의를 지어 퇴계에게 보내자, 복건은 중들이 쓰는 두건과 같아서 쓰기에 온당치 못하다며, 심의를 입고 정자관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젊은 선비 혹은 학인의 차림으로 복건이 적절치 않다고 여긴 이황이 복건 차림을 했을리 만무하다.

진경환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는 ‘조선의 잡지:19~19세기 서울 양반의 취향‘에서 이를 사상·문화사적으로 깊이 따져봐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후에 송시열의 초상화에는 복건에 심의를 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저자는 조선 유학의 거봉인 송시열의 복건 차림은 사상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며, 당시 주자학이 융성했다는 걸 보여준다고 말한다.

‘조선의 잡지’는 조선후기 실학자 유득공이 당시 양반의 의식주를 비롯, 취미와 놀이, 유흥과 공부, 의례까지 생활상을 담은 ‘경도잡지’를 원전으로 삼고 있다. 저자는 유득공이 핵심만 간결하게 적은 걸 낱낱이 분석, 생활사를 복원했다. 특히 그동안 잘못 전해진 오류들을 바로 잡는데 공을 들였다.

신분제 사회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인 18~19세기 서울 양반들은 명품을 선호하고 유행을 따르는 등 개인의 욕망을 채우는데 보다 적극적이었다. 그 중 칼은 사치스런 패물이었다. 장도의 칼자루와 칼집을 은이나 옥, 뿔, 바다거북의 등딱지 등 희귀한 재료로 장식했다. 견마잡이들도 덩달아 허세를 부려 질 좋은 가죽으로 고삐를 만들어 광을 내고 거들먹거리고 다녔는데, 여기에서 ‘거덜났다’란 말이 생겨났다,

서울의 호사가들은 여덟칸 짜리 비둘기 집을 만들어 놓고 누가 더 귀하고 값비싼 비둘기를 사들이냐를 놓고 경쟁했다. 마니아들이 애호한 비둘기 중 작은 몸집에 순백색으로 이마에는 검은 화점 하나가 있는 점모가 가장 비쌌다. 한 쌍에 백문(1000전)이 넘기도 했다, 담뱃대를 걸어놓는 연관대와 청소하는 찔개와 꼬질대, 담배를 빤 후 침이나 가래를 뱉는 타구까지 명품으로 치장했다.

명품 선호와 함께 웰빙 취향으로 화훼 재배와 정원 경영이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집에 기이한 꽃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천금을 주고서라도 반드시 구했고, 외국의 배가 정박했다는 걸 알게 되면 만 리 밖에 있는 것도 가져왔다. 화훼상 중 대표적인 인물은 조팔룡으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애송노인, 곧 소나무를 사랑하는 노인이라 불렀다. 개 중엔 몰락한 양반도 있었다. 이들은 나무를 팔 때 장사꾼 처럼 “나무 사려”라고 외치지 않고 “내나무”라고 외치며 체면을 지키려 했다.

서울양반들의 복어사랑은 유별났다. 유득공은 ‘경도잡지’에서 “복숭아꽃이 채 떨어지기 전에는 복어국을 먹는다”고 적었다. 4월말 경으로 이 때가 가장 맛있고 이후에는 독성이 강해져 먹을 수 없다.복어를 탐하는 건 학인이 할 도리가 아니라는 비판에도 ‘하어약’이라 하여 봄철의 정취를 즐기는 복어 모임까지 있었다. 창의문밖 능금과 승도는 경성의 특산품이었다. 창의문 밖 능금은 특히 경림금이라 했는데 능금이 익어갈 때쯤이면 창의문 인근이 들썩였다고 한다. 복숭아, 살구, 앵두, 오얏, 능금, 석류 등속은 서울사람들이 많이 심어 업으로 삼았다. 당연히 시장에는 과일이 풍성했다. 과일독점, 입도선매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이때부터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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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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