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문제
[이산상봉]“형님이 살아계시다고? 거짓말 아니냐?”
뉴스종합| 2018-08-15 13:45
-3살 때 헤어진 딸 만날 생각에 설레

-“부모님 제삿날부터 물어봐야죠”



[헤럴드경제=공동취재단ㆍ신대원 기자] 8ㆍ15 광복절 계기로 오는 20~26일 금강산에서 열리는 이산가족 상봉행사 대상자로 선정된 이들은 오랜 세월 헤어진 가족과의 만남을 앞두고 밤잠을 설치는 등 설렘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

오는 20~26일 금강산에서 이산상봉을 앞둔 이들은 밤잠을 설치는 등 설렘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3살 때 헤어진 딸과 만나는 황우석(89) 할아버지는 딸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지만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렇게 살아줘 진짜 고맙다”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사진=공동취재단ㆍ헤럴드경제DB]


며칠 뒤면 만날 평생을 그리워한 가족을 생각하면 한없이 기쁘다가도 지나간 세월을 떠올리면 아쉬움과 미안함만이 밀려든다.

세 살 때 헤어진 딸 영숙(71) 씨와 부녀상봉을 하게 된 황우석(89) 씨는 황해도 연백군 출신으로 6ㆍ25전쟁 중 1ㆍ4 후퇴 때 홀로 피난길에 올랐다가 가족들과 생이별했다.

황우석 씨는 “나올 때 3개월만 피난하고 고향에 들어가자는 생각으로 나왔는데 그게 68년이 됐어요. 3살짜리가 68년이 되니 71살이에요”며 “참 소설 같은 얘기에요. 한국에서나 있을 일이지 딴 나라에서는 그럴 일 없잖아요”라고 하소연했다.

황 씨는 워낙 어릴 적 헤어진 탓에 딸에 대한 기억도 흐릿했다.

그는 “세살적에 그게 뭐…기억도 없어요. 기억도 없고 이름보고 찾아야지. 이번에 가서. 강산이 7번 변했는데…”라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미안함도 컸다. “그 어려운 일을 전부 걔가 겪었을 것 아니야. 남자도 아니고 여자가…사실 참 미안하고, 고생을 많이 했을 거고, 외로웠을 거고…”

황 씨는 그래도 딸이 여태까지 살아준 게 고마울 뿐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줘서, 살아서 만나게 돼 감사하다고 얘기해야죠”라면서 “유일하게 살아서 상봉을 하게 된 건데, 그러니깐 고맙죠.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래도 이렇게 살아줘서 진짜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북한 인민군에게 강제징집된 것으로 추정되는 큰형 리종성(85) 씨와 형제상봉을 하는 이수남(77) 씨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수남 씨는 이산상봉 대산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그는 “생사확인해서 68년만에 뜻밖에 확인이 되니까 거짓말 같았어요”라며 “처음에는 이웃, 친척한테도 얘기 안하고 진짜인가 싶어서, 솔직히 쇼킹한…아직도 그런 기분이 남아있죠”라고 말했다.

이 씨는 “그냥 멍한 기분이에요, 이게 무슨 일인가”라며 “생시인가 그래요, 그리고 생각나는 게 ‘아 이게 엄마, 아버지가 생전에 소식을 들었으면…’ 그게 젤 생각나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이 씨는 “광주에 사는 둘째 형님은 심지어 ‘야 그거 거짓말 아니냐’고 해서…”라며 둘째 형 이종식(82) 씨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그는 북한의 큰형에 대해선 “지금 많이 연로하셨겠죠. 한국 나이로 87세니깐, 우리도 늙어가지만 상상이 잘 안돼요”라며 “건강이나 좀 좋았으면 하는 바람이죠”라고 말했다.

또 “87세면, 정말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싶죠”라면서 “형수님도 그렇고, 조카도 그렇고, 살아계시는 게 너무 영광이고 고맙다고…부모님의 한을 우리가 다 누리는 거죠”라고 덧붙였다.

이 씨는 “이산가족이 연세가 있으시고 우리도 나이 먹어가고 하니까 여러 가지 마음이 착잡하죠”라면서 “영구적으로 상설면회소라도 생긴다면 더없이 좋겠다는 바람이죠”라며 벌써부터 마지막일지 모를 형님과의 만남을 아쉬워했다.

함경북도 연백군이 고향인 박기동(82) 씨는 북녘의 여동생 선분(73) 씨와 남동생 혁동(68) 씨를 만난다.

박 씨는 그러나 동생들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아 아쉬울 뿐이다.

그는 “남동생이 두살, 여동생이 여섯 살인데 형이나 오빠를 잘 모를 거에요. 너무 어렸기 때문에…”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3남2녀 중 장남인 박 씨는 6ㆍ25전쟁 당시 서울에서 배제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강화도로 피난왔던 부모님이 어린 두 동생을 데리고 식량을 구하러 고향집으로 갔다 돌아오지 못하면서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박 씨는 추억은 많지 않지만 며칠 뒤 동생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치고 있다. “많이 밤잠을 못자고 설치는 실정이에요. 옛날에 밭에 가서 콩서리 해먹던 생각, 개울에 가서 고기 잡고 그러던 것, 뭐 별의별 생각 다 나는 거죠”

그는 또 “감개무량하죠. 북한에서 나온 사람이 나 혼자뿐이 아니고 수십만명이 되는데…”라며 “이산가족 신청한 게 12만, 13만으로 알고 있거든요. 그 동안에 반 이상이 돌아가시고 5만7000명 남은 중에 만나게 된 걸 행운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박 씨는 동생들을 만나면 부모님이 언제 돌아가셨는지, 제삿날이 언제인지, 또 장지는 어디인지 등을 제일 먼저 물어보겠다며 아쉬움 속에서도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신대원 기자 / shindw@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