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칼럼
[프리즘]수평선과 권력, 일하는 국회법
뉴스종합| 2019-04-16 11:22
사랑엔 뭐가 제일 중요한지 아세요. 기습적인 반문이 훅 들어왔다. 시중은행의 한 노련한 임원은 희망고문에 지쳤다는 표정이었다. ‘신정법(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마이데이터 산업이 각광받을 거라는데 어떤 준비를 하는가’란 질의는 힘을 잃었다. 금융혁신의 방아쇠가 될 신정법 이후의 세상을 묻는데, 물색없이 사랑 운운하니 취재가 산으로 갔다. 그러나 세상 이치에 턱없이 모자란 건 나였다. 답은 명료했다. 사랑엔 타이밍이 중요하다. 비즈니스도, 입법도 제 때를 놓치면 소용없다는 논리였다. 차라리 법을 다 고쳐 놓고 ‘이걸 하겠다’고 발표하면 믿겠다고 했다. ‘된다, 될 거다’는 언사에 속았던 경험에 이골이 난 건 이 임원만이 아니리라.

고백컨대 기자 20년차인 나는 여전히 정부가 내는 자료의 포로다. 스무 장을 훌쩍 넘는 중요 자료엔 펜 끝이 더 무뎌진다. 그럴듯한 계획의 성찬 속에서 길을 잃기 일쑤다. 자료의 끝을 한 장쯤 남기고 정신이 퍼뜩 든다. 소제목으로 따지자면 ‘향후 추진계획’ 부근이다. 대개 아주 큰 표를 만들어 예상 추진 시점을 표시해 놓는다. 쉽게 말해 스케줄표다. 법 개정 사항이 적지 않다. 정부 단독으론 할 수 없는 일이란 게 드러난다. 헛된 기대를 품지 않게 하려면 이 표는 자료의 맨 처음 장에 배치하는 게 양심적이다. 성과주의에 빠져 뭐라도 내세우려는 심산이 읽히면 속이 끓는다.

공무원만의 잘못은 명백히 아니다. 밥값 못한다고 줄창 욕을 먹지만 국회의 4월이 제대로 굴러가길 바라는 건 언감생심인 판이다. 정쟁이 민생과 혁신의 발목을 진흙탕에 쳐박고 있다. 무엇을 위한 정쟁인지는 제쳐둔다. 다투는 당사자들의 정체를 생각해본다. 순번을 정해 집권한 건 아닐테지만, 탄핵 사태만 아니었다면 대체로 10년씩 번갈아 권력을 쥔 집단이다. 권력의 생리ㆍ통치의 메커니즘이 어떤 건지 훤히 알고 있다. 양보하고 접어줄 구석은 서로 챙겨줘야 협상이 되는데 여의도엔 몽니 부리는 하수들만 즐비하다.

그들은 결국 법안에 괴상한 이름까지 붙였다. 바로 오늘 공포되는 국회법 개정안, 속칭 ‘일하는 국회법’이다. 앞선 19대 국회의 각 상임위 산하 소위원회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고 폐기된 법안 비율이 32%에 달한 걸 반성하며 손 본 것이다. 상임위별로 법안심사 소위를 복수로 두고, 매달 두 차례 개회토록 명문화했다. 제헌절인 7월 17일부터 시행한다. 그나마 잘 된 일이라고 박수치면 순진한 거다. 정쟁하느라 깜빡했다고 하면 그만이다. 더구나 그들은 법을 지키지 않아도 불이익이 없다. 민생과 경제가 뒷전인 정쟁은 그들만의 유희일 뿐이다. 1년 뒤면 평가의 시즌, 총선이다. 권력은 그저 수평선과 같은 것이다.

“수평선은 가까이 다가가서 보려고 하면 자꾸만 더 멀리로 도망을 쳐버리곤 하거든. 앞엣놈을 잡으려고 노를 저어가다 보면 그놈은 끝도 없이 멀어지고, 어느새 뒤쪽에 또 다른 수평선이 생겨버리고 말이다”(소설가 이청준의 ‘거인의 마을’) 

홍성원 IB금융섹션 금융팀장 hon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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