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원논설위원칼럼
[광화문 광장-강태은 프랜닥터연세내과 비만클리닉 부원장] 사랑을 쓰려거든 칠판에 쓰세요
뉴스종합| 2019-04-23 11:10
필자의 집에는 3개의 칠판이 있다. 지나던 개가 오줌만 누어도 까르르 웃던 아들의 초등학생 시절, 가족이 함께 보내는 일요일만은 맘껏 웃고 신나게 놀자며 우린 ‘하루 세 번 살기’ 의 미션을 정했다. 인왕산, 북한산, 관악산 등 인근의 산을 수차례 정복하고 고궁에 들러 도심 속 왕족의 숲을 임금님처럼 즐겼으며 저녁이면 다채로운 이야깃거리를 안주 삼아 소박한 밥상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어느 날, 아들이 침울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평생 어린이로 살 수는 없을까?” “왜 그런 질문을 하니?” “아빠 엄마는 학원가라고 강요도 안 하고 나랑 잘 놀아주니까. 나도 형아가 되지 않고 아빠 엄마도 안 늙고 계속 이대로 살면 좋겠어. 지금이 너무 행복해.” 아들의 고백에 가슴이 뭉클했다. 그리고 아들이 성장하면서 잊게 될지 모르는 그 고백을 평생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따스한 가족애를 느끼며 집으로 오는 길, 문구점 앞에 놓인 칠판을 보자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칠판에 서로 칭찬을 적어볼까?” 우린 설레는 맘으로 칠판 3개를 사 왔고 번갈아 짝을 이루어 다른 한 사람에 대한 칭찬을 적기 시작했다. 가족의 일원으로 잘 살아왔는지, 엄마로서 넘치는 사랑을 지속적으로 공급했으며 아내로서 의무와 역할에 충실했는지. 함께 산 가족에게 성적표를 받는 기분이었다. 내 칭찬이 무얼까 설렘도 컸지만 서로에 대해 10개의 칭찬을 채우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리고 그 날, 필자는 삶의 근본으로 삼을 ‘칭찬 10조’를 받게 되었다. 첫째, 엄마는 의리가 있다. 둘째, 엄마는 날씬하다. 셋째, 엄마는 글씨를 잘 쓴다. 넷째, 엄마는 고기를 잘 사준다. 다섯째, 엄마는 잘 가르쳐준다. 여섯째, 엄마는 부지런하다. 일곱째, 엄마는 잔소리가 없다. 여덟째, 엄마는 화를 안 낸다. 아홉째, 엄마는 안 아프다. 열 번째, 엄마는 아빠와 나를 최고로 사랑한다.

고백컨대 가족이 완성해준 칭찬 목록에는 나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난 불의나 실수를 보면 못 참는 ‘전사’(fighter)였고 직장에서 수천 마디를 한 뒤라 말을 줄였을 뿐 잔소리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소싯적 억울하게 타고난 비만유전자를 비관하며 우울한 시절을 보내기도 했고 치통, 복통, 생리통에 스트레스를 더한 신경성 통증으로 365일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하지만 부엌에 나란히 걸어둔 칭찬칠판을 보며 필자는 달라졌다. 의리 있는 엄마가 되기 위해 아들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켰다. 워킹 맘의 치열한 삶과 부모님의 병간호로 지쳐있던 시기, 아들과 약속한 ‘한 달에 한 번 영화 보기’를 지키려 31일 밤 심야 영화를 보러 가 코를 골기도 했고 맛깔 나는 음식들로 내 위장을 가득 채우고 싶던 날에는 날씬함을 칭찬했던 칠판의 그 글씨가 남편의 것임을 기억하며 식욕을 절제했다. 비난이 머리를 스칠 땐 입을 꼭 다문 채 수많은 잔소리를 목구멍으로 삼켰고 작은 칭찬을 찾아 동기를 심어주면서 지적과 반항심으로 단절될 뻔했던 모자의 관계를 칭찬과 이해심으로 극복했다.

필자에겐 나쁜 습관이 있었다. 나쁜 줄 알면서 끊지 못하던 콜라다. 노력해도 끊을 수 없던 그것을 ‘안 아픈 엄마’라 칭찬하던 아들을 기억하며 끊었다. 미래의 어느 날 내 몸을 살피지 못해 고생할 가족들을 생각하며 중독된 뇌를 치유한 거다. 아들과 남편도 달라졌다. 아들에겐 유치원 버스에서 길을 잃어 집을 찾아온 충격의 사건이 있다. 하지만 이를 공간 지각력이 뛰어난 아들이라 칭찬하자 ‘공간’ 개념이 필요한 천체와 벡터 이론엔 최강자가 되었다. 게임을 잘한다는 아들의 칭찬을 받은 아빠는 오늘도 게임을 통해 21살 아들과 소통한다. 결국 칭찬칠판은 내 삶을 바로잡은 근본이 되어왔고 “내 남편이, 내 아들이 날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생각하며 가족에 대한 예의와 사랑을 이어가는 매개체가 되었다.

곧 가정의 달이 다가온다. 사랑하는 가족, 또는 함께 하고픈 누군가가 있는가? 내 옆에 놀아 달라 애원하는 그들이 언젠간 내가 놀자 청할 때 함께 할 수 없는 날도 있음을 반드시 기억하며 서로의 칭찬을 통해 견고한 사랑을 빚어가는 5월의 추억을 준비하기 바란다.

강태은 프랜닥터연세내과 비만클리닉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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