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원논설위원칼럼
[라이프 칼럼-김다은 소설가·추계예술대 교수] 읽어도 좋지만 읽지 않아도
뉴스종합| 2019-06-25 11:21
알랭 드 보통의 철학 에세이를 담은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에는 책을 지나치게 믿는 사람들에게 대한 경고가 있다. 직업상 책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필자는 이 경고를 매우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던 기억이 있는데, 문제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위대하다는 책들은 우리의 경험을 조명해주고 우리로 하여금 자아의 발견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부추기기보다는 문제가 많은 그늘을 드리울 수도 있다. 그런 책들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여러 양상 중에서 글로 증명되지 않은 것들을 내팽개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우리의 지평을 확장하기는커녕 그런 책들은 부당하게도 울타리를 치는 결과를 낳는다.”

작가는 아리스토텔레스나 몽테뉴의 책들을 통해 책의 부적절한 위로에 대해 생각을 전개하고 있었다. 즉,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책들이 갖는 위험성은 독자가 그것을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느끼도록 유도하여, 더 이상 사유를 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이다. 어떤 부분의 내용이 옳은지 그른지 자신의 생각 자체를 발동시키기보다, 책의 권위에 눌려 자신의 의견을 지니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앞선 지식에 대해 무례함을 범할 용기를 갖지 못하게 한다는 지적이다.

독서가 자아를 발견하는데 도리어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언급도 의미심장하다. 책을 읽으면, 지식과 교양을 쌓을 수 있다는 거의 절대적인 편견과 오해가 있다. 하지만 맹목적인 독서는 ‘나’를 채우기보다 책이 나를 채워갈 가능성이 높다. 2014년도 세계일보 신춘문예당선소설 ‘페이퍼맨’에, 책을 씹어 먹어서라도 책의 내용을 기억하고자 하는 주인공이 나온다. 아버지가 억지로 기억하게 만든 역사의 연대와 사건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종이를 씹기 시작한 그는 이를 통해 성취감을 느끼게 되고, 종이로 자신을 채워나가게 된다.

독서량에 대한 맹신을 버릴 필요가 있겠다. 많은 책을 읽는 것에 자족하거나 타인에게 자랑해봤자 소용이 없다. 100권을 읽어도 몇 권의 책을 제대로 사유한 사람을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식의 넓이는 페이퍼맨의 것일지 몰라도, 독서의 깊이는 한 개인의 사유의 힘이기 때문이다. 사유란 천천히 시간을 갖고 읽은 바를 되새기고 발효되어야 나타나는 지혜이다. 그 자체로 저장되기보다,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실천적인 것이기도 하다.

방학이 코앞이다. 새삼스럽게 독서에 대해 돌아보게 된 것은 어떤 책들을 읽으면 좋은지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답은…. 방학 동안 어떤 책을 읽어도 좋지만 억지로 읽지 않아도 좋다. 책은 우리에게 뭔가를 주기도 하지만 뺏어가기도 한다. 책은 자신의 한계로 우리의 호기심의 창문을 닫아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시하지만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감각을 무시하기도 한다. 그래서 삶의 생생한 현장을 보고 느끼기 위해서 책을 과감하게 재낄 필요가 있다. 그러다가 조용히 읽고 싶은 마음이 밀려오면 다행이다. 이때는 작가의 생각만 버티게 하지 말고, 내 작은 생각이 물결처럼 흔들리는 대로 따라 움직이기 바란다. 책 속을 노닐며 관찰하고 비판하고 즐기기를 바란다. 조금 평범하고 무례한 독서를 해도 좋다는 뜻이다. 책을 숭배하면서 책 읽는 노예로만 더운 여름을 살지 않기 바란다.

김다은 소설가·추계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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