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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공간의 힘’…인간의 삶을 바꾼다
라이프| 2019-08-23 11:30
세비야 중심가의 거대한 광장에 그늘을 드리운 위르켄 마이어가 만든 메트로폴 파라솔. “신중하게 고민해 능숙하게 사용한 은유는 수많은 연상작용을 일으킴으로써 건축환경의 고정성을 완화하고 이에 쉽게 길들여지는 경향에 제동을 건다.”
세라 W. 골드헤이건 지음 윤제원 옮김 다산사이언스

뉴욕의 버려진 땅 철도기지에 들어선 건축물 베슬은 2500개의 벌집으로 이뤄진 독특한 구조로 단숨에 랜드마크가 됐다. ‘영혼이 있는 건축가’ 토마스 헤더윅의 건축철학이 주변경관과의 어울림임을 감안하면 베슬의 아름다움은 자연스럽다. 그렇긴 해도 왜 벌집인가는 의문이 남는다. 그 실마리를 풀어줄 연구가 있다. 인간의 뇌 속 그리드는 직각이 아니다. 공간을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 인간의 뇌는 비의식적으로 육각 그리드를 그린다. 벌집이나 비누 거품 같은 형태인데, 사람들은 이런 공간에 본능적으로 끌린다는 것이다.

요즘 건축계 트렌드는 인지신경과학을 접목한 신경건축학이다. 즉 건축적 공간디자인이 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는 것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건축평론가 세라 윌리암스 골드헤이건의 ‘공간혁명’(다산사이언스)은 바로 인지건축학적 입장에서 공간이 얼마나 인간의 삶의 질에 결정적인지 뇌와 건축물들을 오가며 보여준다. 골드세이건은 하버드 디자인스쿨에서 10년간 교수로 건축사를 가르쳐왔으며. 이 책은 교수직을 그만두고 7년을 투자해 완성한 역작이다.

골드세이건에게 좋은 공간이란 사용자들이 그 공간을 어떻게 인지하느냐에 달려있다. 즉 공간에서의 느낌과 행동이 편하고 행복한가, 또한 창의적 감각을 자극하느냐이다.

건축환경, 즉 장소와 공간의 무게감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건 기억을 얘기할 때 여실히 드러난다. 신경학적으로 볼 때 장소를 파악하는 능력과 장기 기억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둘 다 장소세포를 사용한다. 누군가와 나눈 의미있는 대화는 대화를 나눈 장소 정보와 함꼐 기억관련 암호로 바뀐다. 세 살 이전의 기억이 거의 없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세 살이 되어야 공간 길 찾기 전략이 발달하기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기억과 이어진 감각 요소가 새롭게 마주치는 환경에 의미를 부여할 때 우리의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가령 새로운 집을 볼 때 우연히 햇빛이 들어오는 바닥을 통해, 어린시절 늦은 오후 형과 함께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놀았던 기억이 나면서 선택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 뿐만 아니라 타인과 세계에 대한 이해 모두 물리적 환경과 깊이 연관돼 있음을 보여준다. 그만큼 건축환경과 디자인이 인생과 사회, 정치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얘기다.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저자에 따르면, 주변환경과의 조화와 인간의 감성과 행동을 고려하지 않은 무신경한 건물이나 시각적인 충격만 주는 건축물이 재생산되고 있다. 건축가와 디자이너가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건축 환경을 경험하는지에 대해 배우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좋은 디자인이 인간의 건강과 행복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드라마틱하고 눈에 띄는 시각 구조를 강조하라는 교육만 받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실에선 자금 등의 이유로 하루 빨리 프로젝트를 완성해야 하는 부담때문에 평균 정도의 건축물을 만들 수 밖에 없다.

건축환경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시민들의 무기력감도 불쾌한 건축물이 범람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저자의 가차없는 비판에 우리나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들어있는 점은 유감스럽다. 세계적인 건축가 고 자하 하디드가 지은 DDP와 관련, 저자는 하디드가 공개한 프로젝트 사진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와 실제가 많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새하얀 색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녹색 조경이 가득한 공원에 설치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사진을 보면 마치 살아 숨 쉬는 거대 고래가 서울 시내 선큰광장에 나와 있는 듯한 자태에 눈길이 간다”며, “하지만 사진이 아닌 실물을 보면 콘크리트는 금이 가 있고, 접합 부분들은 어긋나 있으며 조경 설계도 엉망이라 녹색은 다 말라버리고 덧없는 갈색만 남았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이와 함께 세계적인 건축가 렘쿨하스가 속한 OMA가 디자인한 시애틀중앙도서관도 도시의 공적영역과의 연결, 책을 읽을 만한 조용하고 편안한 공간 부족, 불편한 편의시설 동선 등 실패한 건축으로 꼽는다.

반면, 좋은 건축은 다양한 감각들을 배려한 것으로, 저자는 건축가 알바르 알토가 고향 핀란드 북부에 지은 노란 층계와 목재 난간의 파이미오 요양소를 예로 든다. 온도감각을 통해 밝고 따뜻한 감성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또한 좋은 건축은 활기를 불어넣어주고 사람을 자극한다. 세비야 광장에 그늘을 드리우는 거대한 버섯 모양의 나무를 격자형태로 배열한 위르겐 마이어 H의 ‘메트로폴 파라솔’은 다양한 연상작용을 일으키며 건축환경을 생동하게 한다. 저자는 에딘버러 소재 스코틀랜드 의회 건물에 대한 찬사를 길게 이어가는데 민주적 열망을 상징하고 촉진하며 주변환경과의 조화, 개인주이적인 국민정서를 주체화한, 디자이너들이 배워야할 교본 같은 장소라고 평가한다. 도시디자인과 건축, 조경 건축 등 건축 환경에서 나타나는 인간을 위한 디자인의 여러측면을 종합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삶과 장소의 질을 높이는 건축환경을 마련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습관화”라며, 시간이 지나면 좋은 디자인도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할 수 있지만 자연의 가변성과 사람들의 활동 무대를 활용해 이를 방지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책에는 저자가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찍은 건축사진이 풍성하게 들어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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