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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샤롯데의 연인’ 신격호…83엔이 115조원이 되다
뉴스종합| 2020-01-19 20:57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명예회장이 19일 별세했다. 향년 99세. 사진은 1965년 입국하는 신 명예회장의 모습. [롯데지주 제공]

[헤럴드경제=신소연·박로명 기자] “내 일생 일대의 최고의 수확이자 선택이다”

19일 별세한 신격호 명예회장이 ‘롯데’라는 사명을 작명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그만큼 신 명예회장은 ‘롯데’라는 사명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왜 그토록 롯데라는 사명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을까?

롯데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 여주인공 ‘샤롯데’의 애칭이다. 롯데라는 사명도 샤롯데에 대한 신 명예회장의 흠모에서 시작됐다. 신 명예회장이 단돈 83엔을 들고 일본으로 향하는 밀항선을 탄 것도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 였다.

소설가가 꿈이었던 신 명예회장은 하지만 그의 꿈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1948년 일본인들이 서구문물이라며 싫어하던 풍선껌을 만드는 회사에서 출발한 롯데는 지금은 자산 115조원이 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83엔 밀항선에 꿈을 싣다= 신 명예회장은 1921년 10월 4일 영산 신씨 집성촌인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서 5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 명예회장은 당시 형편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73가구가 모여 사는 마을 세 번째 부자였지만 논 열다섯 마지기에서 나온 것을 식구들이 먹고 나면 조금 남는 정도”라고 회고했다.

신 명예회장은 자신이 태어난 울산 둔기리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그는 댐 건설로 수몰돼 사라진 둔기리 사람들을 위해 43년간 매년 5월 첫째 일요일, 위로 잔치를 열었다.

어린시절 10~20㎞에 달하는 거리를 걸어서 통학할 정도록 학부열도 컸던 신 명예회장은 “일본으로 가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자랐다고 한다.

소설가가 되겠다던 젊은 청년 신격호는 41년 단돈 83엔을 들고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싣는다. 신문·우유 배달을 하며 와세다대학 이학부인 와세다 고공 야간부 화학과를 마쳤다.

신 명예회장이 사업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우연과 필연이 교차했다. 우연히 만난 사업가 하나미쓰가 청년 신격호를 높게 평가하면서 사업자금 5만엔을 빌려 준 게 기업가 신격호의 첫 출발선이다.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명예회장이 19일 별세했다. 향년 99세. 사진은 롯데제과 공장을 순시하는 신격호 명예회장. [롯데지주 제공]

▶풍선껌…신격호의 인생을 바꾸다=순탄할 것 같던 사업은 그러나 처음부터 실패의 쓴잔으로 돌아왔다. 하나미쓰가 빌려준 5만엔으로 44년 도쿄 인근에 윤활유 공장을 세웠지만, 미군의 폭격을 받아 가동도 못하고 불타버리고 만 것. 신 명예회장이 평소 화재 등 안전사고에 각별히 신경을 쓴 것도 이 때의 경험 때문이다.

신 명예회장의 신뢰와 뚝심이 힘을 내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 45년 해방이 되면서 일본에 거주하던 한국인이 대거 귀국하는 와중에도 신 명예회장은 “나를 믿고 돈을 빌려준 사람을 두고 갈 수는 없다”고 했다고 한다.

실패한 기업가 청년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우유를 배달하고,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그렇게 꼬박 꼬박 모은 밑천으로 신 명예회장은 46년 도쿄에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라는 공장을 짓는다. 신 명예회장은 비누 크림 등을 만들어 팔아 1년 반 만에 빚을 다 갚는 능력을 발휘했다. 신 명예회장은 당시 자신을 믿고 돈을 빌려준 하나미쓰에게는 고마움의 표시로 집까지 한 채 사 주었다.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4층 신 명예회장의 집무실엔 지금도 ‘롯데 그린껌’의 사진이 걸려 있다고 한다. 그린껌은 신 명예회장의 인생을 바꾼 제품이다.

신 명예회장은 48년 6월 종업원 10명과 함게 롯데를 설립한다. 롯데가 처음으로 내놓은 제품이 풍선껌이다. 풍선껌은 당시만해도 일본에서 반감이 컸던 제품이다. 서구문물이라는 반감에 배고픈 시절에 풍선껌같은 사치품이 팔리겠냐는 주변의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신 명예회장의 풍선껌은 줄 서서 사야할 정도로 대박을 터뜨렸다.

껌 시장에서 성공한 신 명예회장은 초콜릿과 캔디류, 빙과류 시장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 나갔다. 실패도 없었다. 그는 단기간에 시장을 장악하는 뛰어난 능력과 수완으로 롯데를 일본 내 대표적인 식품기업으로 키워냈다. 신 명예회장은 1988년에는 포브스 선정 세계 부자 4위에 오르기도 했다.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명예회장이 19일 별세했다. 향년 99세. 사진은 1979년 12월 17일 롯데쇼핑센터 개장 당시 모습. [롯데지주 제공]

▶65년 김포공항 첫 발…숙원을 이루다=귀화하라는 주변의 권유에도 신 명예회장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소설가 꿈을 안고 밀항선을 탔던 신 명예회장은 일본에서 기업가로 성장하자 이번엔 또 다른 꿈을 꿨다. “모국에서 사업을 펼치고 싶다”는게 그의 숙원이었다.

65년 한·일 수교로 경제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신 명예회장의 꿈도 한 발짝 다가왔다. 65년 오른손에 서류가방을 꼭 쥐고 김포공항 활주로를 걸어나가는 신 명예회장의 사진은 그의 한국 역진출 꿈이 첫 발을 딛든 순간이기도 했다.

“‘품질본위, 박리다매, 노사협조’를 바탕으로 기업을 통해 사회 및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기업이념”이라는 롯데제과(67년)의 광고는 신 명예회장의 꿈과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평가다.

롯데제과는 쥬시후레쉬, 스파이민트, 빠다쿠키 등 공전의 히트 상품을 내세워 빠르게 성장했다.

신 명예회장은 73년에는 서울 소공동에 지하 3층, 지상 38층 규모의 롯데호텔을 준공한다. 롯데호텔은 당시만해도 ‘동양 최대의 마천루’로 무모한 도전처럼 보였다. 하지만 신 명예회장은 6년간 1억5000만 달러를 투자해 무모한 도전을 현실로 바꿨다. 1억5000만 달러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와 맞먹는 엄청난 규모다.

‘롯데 50년사’에 따르면, 신 명예회장은 75년 보고서에 10층 규모의 백화점을 세우고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면세점을 포함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신 회장이 당시만 해도 무모한 것처럼 보이던 관광과 유통에 관심을 둔 이유는 “특별한 자원을 들이지 않고도 외화를 획득할 수 있는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79년 12월 17일 신 명예회장은 마침내 소공동 롯데호텔 옆에 롯데쇼핑센터(현 백화점)를 오픈한다. 개관일엔 서울시민 30만명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뤘다. 수도권 인구가 800만명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흥행이었다. 롯데쇼핑센터는 개점 100일 만에 입장객 수 1000만명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우는 진기록도 세웠다.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명예회장이 19일 별세했다. 향년 99세. 사진은 2011년 6월 5일 롯데월드타워 건설현장을 방문한 신 명예회장. [롯데지주 제공]

▶마천루의 꿈…그리고 시련의 불씨=‘서울의 랜드마크’에 대한 신 명예회장의 꿈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88년부터 ‘제2롯데월드 사업’이라는 명칭으로 시작된 초고층 프로젝트가 바로 그 것이다. 하지만 제2롯데월드는 프로젝트 시작 30여년만인 2017년 비로소 완공될 정도로 신 명예회장에게 적지않은 도전을 남겼다. 이는 롯데그룹에 대한 검찰의 전방위 수사 시발점이기도 했다.

게다가 시련의 불씨는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후계 구도에서도 싹트기 시작했다. 일본 롯데는 장남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대표가, 한국롯데는 신동빈 현 롯데그룹 회장이 맡는다는 암묵적인 동의는 거미줄처럼 얽힌 지배구조로 인해 최대 위기를 맞았다.

신 명예회장은 끝내 장남과 차남의 화해를 보지 못하고 영면에 들어갔다.

carrier@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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