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헤럴드시사] 황당한 USMCA 자동차 원산지 기준
뉴스종합| 2020-09-02 11:36

지난 7월 1일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이 발효됐다. 이 협정은 1994년 발효된 북미 3국 간 자유무역협정(NAFTA)을 개정한 것으로, 굳이 협정의 명칭까지 바꿀 필요는 없었으나 자신의 방식대로 처리하길 좋아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돼 새 명칭을 달게 됐다.

USMCA 협정은 기존 NAFTA 협정 체계를 유지하면서 미국이 추구해왔던 새로운 조항이 다수 추가됐다. FTA 무역협정 최초로 도입된 디지털무역 장(Chapter)에 미국의 첨단 디지털기업인 GAFA(구글·아마존·페이스북·애플)에 유리한 조항을 포함했다. 데이터 국외 이전 허용, 플랫폼기업에 대한 면책, 소프트웨어 소스코드 개방 금지 등 GAFA가 캐나다와 멕시코에서 능력껏 사업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만들어줬다.

중국에 대한 무역 제재를 대선공약으로 내건 트럼프 대통령은 캐나다와 멕시코가 중국과 양자 간 무역협정 체결에 제동을 걸기 위해 비시장국가와 무역협정 체결 추진시 협상 개시 3개월 전에 다른 회원국에 통보해야 하고, 협상 타결 후에는 관련 내용을 제공하도록 했다. 더 나아가 비시장국가와 무역협정 체결을 이유로 USMCA 탈퇴가 가능한 것으로 규정했다.

비시장국가 관련 무역협정 조항을 추가한 것은 중국산 제품이 캐나다와 멕시코를 우회해 미국으로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려는 조치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우회 수출을 방지하기 위해 원산지 규정이 채택돼 있음을 고려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통상 규범상 상상도 하기 어려운 조항을 규정한 USMCA를 멕시코와 캐나다가 수용한 것을 보면, 미국 시장에 대한 특혜적 접근이 이들 국가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가장 황당한 규정은 원산지 규정이다. 선거 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집중 공략했던 ‘러스트벨트(쇠락한 공업지구)’의 상징인 자동차산업에 대한 역내산 원산지 기준을 강화했다. 자동차에 대한 무관세를 적용받으려면 회원국 역내 생산부품 비중을 NAFTA의 62.5%에서 75%까지 늘려야 한다. NAFTA가 발효된 1990년대 당시만 해도 62.5%는 턱없이 높은 역내 조달 요건이었는데, 지난 수십년간 글로벌 공급망이 확충된 점을 고려하면 이 비중을 낮추는 것이 경제 현실과 부합할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75%로 올리려 하자 미국 자동차업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원산지 요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동차 생산에 필요한 철강과 알루미늄 중 북미산 비중 역시 기존 30%에서 70%로 높였고, 자동차부품의 40% 이상은 시간당 16달러 이상의 임금을 지불받는 생산인력에 의해 생산돼야 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요건도 포함했다. 이 모든 요건을 동시에 충족해야만 무관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1만개 이상의 부품이 투입돼 완성차가 만들어지는 생산공정 탓에 자동차는 원산지 관리가 가장 어려운 산업이다. 여기에 또다시 요건을 강화함에 따라 미국 기업도 원산지 관리를 하기 어렵게 됐다. 상반기 트럼프 대통령을 면담하는 기회에 미 자동차업계는 원산지 기준관리 애로를 들어 적응 기간을 길게 잡아주거나 기업 관리가 용이한 다른 방식을 모색해줄 것을 정책 당국에 건의하기도 했다. 미 의회 역시 자동차에 대한 무리한 원산지 규정이 초래할 부작용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기업친화적인 방안 마련을 촉구하자, 통상 당국은 메이커별 자동차 생산 대수 중 일부에 한해 USMCA 발효 후 5년까지 효력이 유지되는 대안적인 원산지 기준을 발표했다.

무역협정은 기업의 비즈니스 활성화를 위해 체결한다. 하지만 USMCA에는 트럼프의 횡포로 비즈니스 현실과는 동떨어진, 정치논리에 입각한 원산지 조항을 다수 포함했다. 당사국 자동차산업에 부담이 되는데, 멕시코에 진출한 국산 자동차 메이커의 고충은 더욱 클 것이다. 이렇게 원산지 기준을 의도적으로 왜곡시킨 것은 미국 내 자동차업 기반이 유지되게 하려는 산업정책적 고려 때문이겠지만 결국 가격인상으로 미국 소비자 부담을 키우게 될 것이다. 오는 11월 미 대선에서 러스트벨트의 표심이 궁금해진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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