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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별세] 화형식까지 하며 이룬 '애니콜 신화'…車 산업 도전은 실패
뉴스종합| 2020-10-25 11:52
이건희 회장 재임 기간 삼성은 '애니콜 신화'를 써내려간 반면 완성차 사업은 IMF 위기로 실패하기도 했다. 1997년 5월 12일 삼성자동차 부산공장 방문해 시험차량 시승한 이건희 회장. [연합뉴스]

[헤럴드경제] 이건희 회장은 재임기간 첨단 기술산업 분야에 도전해 '초격차'를 이루고 해외사업을 활성화해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서 토대를 닦았다.

이 회장은 1990년대 들어 그룹의 소유와 경영 체제를 명확히 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에 집중했다. 1991년 11월에는 신세계와 전주제지(현 한솔제지), 1993년 6월 제일제당(현 CJ)을 분리했다. 1995년 7월에는 제일합섬을 떼냈다.

그 결과 삼성그룹은 전자·중공업·화학 등의 핵심 사업군과 이를 뒷받침할 금융서비스 사업으로 사업 구조가 새롭게 짜였다.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신경영 선언 이후에도 그룹에서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자 이 회장은 또 결단한다.

1995년 3월 삼성전자 구미사업장 운동장에선 이 회장의 명령에 따라 무선전화기 등 삼성 마크가 붙은 전자제품 15만점이 놓였다. 해머를 든 직원들이 제품을 때려 부쉈다. 무선전화기엔 불이 붙기도 했다. '삼성의 품질만은 믿어달라'는 이회장의 메세지였다.

1994년 국내 4위였던 삼성의 무선전화기 시장 점유율은 1년 뒤 시장 점유율 19%를 달성하며 1위에 올라섰다.

1990년대 중반부터 애니콜은 국내 시장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갔다. 당시 휴대전화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자랑하던 모토로라가 유일하게 실패한 곳이 한국이었다. 애니콜의 인기는 전략 스마트폰인 갤럭시S 시리즈 등 모바일 기기로 이어졌다.

반면 이건희 회장의 필생의 도전인 자동차사업은 아쉬움으로 끝났다. 이 회장은 취임 직후부터 자동차사업 태스크포스(TF)가 구성했다.

이 회장은 에세이에 "나는 자동차 산업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공부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세계 유수의 자동차 메이커 경영진과 기술진을 거의 다 만나봤다. 즉흥적으로 시작한 게 아니고 10년 전부터 철저히 준비하고 연구해왔다"며 자동차 산업에 대한 깊은 애착을 표현한 바 있다.

1993년 일본 후쿠오카회의에선 "자동차부품의 30%는 전자부품인데 주력업종, 문어발을 따질 때인가"라며 그룹별로 주력 업종을 지정하던 정부 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삼성은 부산 신호공단을 근거지로 상용차 사업에 뛰어들고 이어 승용차 사업에 출사표를 던진다.

1995년 삼성자동차 부산공장이 착공했고 프로젝트명 KPQ(SM5)의 시승회도 열렸다. 이 회장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때 평소 타던 벤츠 대신 삼성자동차 최고급 사양 모델인 SMS525V를 타고 간다.

그러나 기아차 도산 사태와 IMF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금융당국은 삼성에 결단을 내릴 것을 요구했다. 차 한대당 150만원의 손해가 났기 때무이다.

결국 이 회장은 삼성자동차를 법정관리에 맡기고 이 회장이 보유한 삼성생명 주식 350만주를 채권단에 증여하기로 약속한다. 근로자와 하청업체에 대한 보상안도 내놓았다. 삼성자동차는 2000년 르노에 인수됐다.

onlinenew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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