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박영준의 안보 레이더] 미·중 패권경쟁시대의 국제전략
뉴스종합| 2020-10-28 11:31

초등학교 다니던 어린 시절, 핵공격 대피 민방공훈련을 하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미소 간 핵전쟁이 일어날 경우 핵 방사능 낙진 피해 방지를 위해 운동장 구석에서 비닐 마스크를 쓰고 대피하는 훈련을 종종 했다. 필자의 부모세대는 6·25전쟁 피난길에 오르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고, 그 윗세대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치하의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20세기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의 삶에 엄습한 이러한 풍경들은 크게 보면 강대국 간 패권경쟁이 빚어낸 것이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국력을 증강하면서 기존 강대국들에 도전한 것이 러일전쟁, 중일전쟁, 그리고 아시아태평양전쟁이었고, 그 와중에 한반도가 제국주의 침탈을 받았다. 미소 냉전 초기 소련의 지원 약속을 믿고 분단된 한반도를 통일하겠다고 북한이 도발한 것이 6·25전쟁이다. 강대국이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패권경쟁을 할 때마다 한반도는 주요 무대가 되어 왔다. 21세기에도 그러한 지정학적 숙명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2010년 전후 본격화된 미국과 중국 간 패권경쟁은 비단 군사 분야뿐 아니라 무역, 과학기술, 국제기구에서의 영향력 확대로 확산되고 있다. 미 대선 결과 누가 당선되는가에 관계없이 차기 행정부의 대중정책은 강경 대응 기조를 유지할 것 같다. 그에 맞서 중국도 시진핑 국가주석의 6·25전쟁 참전 70주년 기념연설에서 보였듯이 ‘항미원조’ 정신으로 21세기 대미관계를 꾸려갈 것으로 보인다.

미중 간 전략경쟁이 패권전쟁 양상으로 귀결될 것인가는 현 단계에서 분명하지 않다. 조지프 나이나 로버트 길핀 같은 학자들이 강조하듯 국가지도자의 정책 선택과 국제기구와 주요 중견국가의 역할에 따라 강대국 간 패권경쟁이 평화적으로 해소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미중 간 패권경쟁이 이전 사례들처럼 40~50년 이상 장기에 걸쳐 전개될 것이고, 전 세계 모든 국가가 그 파장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세계 주요 국가들은 미중 패권경쟁 양상의 귀추를 지켜보면서 자신들의 국가이익을 가장 잘 보호할 수 있는 대외 전략 강구에 여념이 없다.

사실 미국과는 동맹국이고 중국과는 최대 교역관계를 맺으면서, 지정학적으로 양국 사이에 처한 대한민국이 이러한 전략적 고민을 가장 치열하게 전개해야한다. 그러나 이 같은 절박성에도 우리 정치지도자들이 이 문제를 고민하는 치열한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국회와 행정부가 국정감사를 벌였지만 외교안보는 물론 과학기술이나 경제에서도 강대국 패권경쟁 하에서 우리의 국제 전략을 심도 있게 논의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경제력이나 군사력 기준으로 세계 10위권에 달하는 중견국가가 됐다. 이 같은 국가적 위상과 능력을 기반으로 미중 간 패권경쟁이 우리의 안정과 번영에 손상을 가하지 못하도록 대외전략을 강구하고 추진해야 한다. 일본, 호주, 인도는 물론 캐나다, 독일, 베트남, 인도네시아와 같은 여타 영향력 있는 중견국가들과 긴밀한 협조를 통해 국제질서의 안정이 유지되도록 연대할 필요가 있다. 유엔이나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B)과 같은 주요 국제기구에서 미중이 국제사회의 안정과 번영에 연결되는 규범을 준수하도록 공동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북한에도 비핵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않을 경우 한반도 문제가 미중 간 발화점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나아가 한미동맹과 한미일 협력 등 기존 외교 기조를 유지하면서 우리 스스로 지역 정세 불안 요인을 만들어선 안 된다.

그런 점에서 한중일 정상회담과 같은 중요한 국제협의체가 개최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은 무척 아쉽다. 미중 패권경쟁 파고 속에서 지금까지 애써 이룩한 중견국가의 위상과 국력이 지속될 수 있도록 국가 차원의 다각적인 국제전략을 강구할 때다.

박영준 국방대 안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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