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RM은 ‘이건희 컬렉션’·로제는 리움…미술계 움직이는 K팝 스타들
라이프| 2021-10-22 09:17
삼성미술관 리움의 재개관 사흘 전인 지난 5일, 블랙핑크 로제는 ‘인간-일곱 개의 질문’에 전시된 론 뮤익의 ‘마스크II’(2002)와 함께 찍은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로제 인스타그램]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누구보다 빨랐고, 확실하게 취향을 드러냈다. 삼성미술관 리움의 재개관 사흘 전인 지난 5일, 블랙핑크 로제의 인스타그램엔 “내가 좋아하는 몇몇 작품”이라며 미술관에서 찍은 사진들이 올라왔다. 그중 한 작품은 리움미술관 재개관 기념 기획전인 ‘인간-일곱 개의 질문’에 전시된 론 뮤익의 ‘마스크II’(2002). 1m의 압도적 크기, 편안히 잠든 남자의 표정과는 대비되는 텅 빈 뒤통수. 극사실적으로 만들어져 빈껍데기 인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로제는 남자의 뒤에 서서 사진 한 장을 찍어 올렸다. 기획전에 함께 전시된 이불의 ‘사이보그’도 ‘로제 픽’이었다. 리움미술관에 따르면 로제는 미술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사전 관람에 지인과 함께 다녀갔다.

같은 날 방탄소년단 RM은 전남도립미술관에 다녀왔다.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고귀한 시간, 위대한 선물’을 관람하기 위해서다. 미술애호가로 익히 알려진 RM은 올해 ‘이건희 컬렉션’이 공개된 이후 전국의 미술관을 찾아가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물론 대구미술관도 찾아 인증샷을 올리기도 했다. 이지호 전남도립미술관장은 “‘이건희 컬렉션’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 전시인데, RM의 방문으로 더욱 큰 의미를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방탄소년단, 블랙핑크 등 K-팝 그룹들이 미술계의 막강한 인플루언서로 떠오르고 있다. 방탄소년단의 리더 RM은 그 중심에 있는 미술애호가다. 지난 5일 그룹의 공식 트위터엔 전남도립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고귀한 시간, 위대한 선물’ 전시에 다녀온 사진을 올렸다. [방탄소년단 공식 트위터 캡처]

전 세계를 사로잡은 K-팝 그룹들이 미술계의 막강한 인플루언서로 떠오르고 있다. 방탄소년단의 리더 RM이 대표적이다. RM의 미술에 대한 안목과 애정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2019년 즈음이다. 당시 한국국제아트페어에서 목격된 것을 시작으로 공연차 방문한 부산에서 혼자 부산시립미술관을 방문해 화제가 됐다. 올 한 해만 해도 앨범작업, 공연 준비 등으로 바쁜 와중에도 서울, 대구, 광주 등을 오갔다. 미술관의 규모와 인지도 역시 가리지 않는다. 국립현대미술관, 국제갤러리 등은 물론 관심 있는 작가를 찾아 잘 알려지지 않은 전시공간도 예고 없이 방문해 갤러리를 놀라게 하기도 한다. 가수 씨엘은 “한국에 오면 항상 국립현대미술관에 들른다”며 “한국 작가들을 보며 음악적 영감을 얻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구미술관의 ‘이건희 컬렉션’ 전시에 걸린 유영국 작품을 배경으로 한 방탄소년단 RM의 사진이 올라오자 이곳은 아미와 관람객의 포토존이 됐다. [방탄소년단 트위터 캡처]

미술계 관계자들은 “RM과 같은 K-팝 스타들의 방문으로 지난 몇 년 사이 미술계에 활기가 넘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을 통해 팬들은 물론 일반 대중까지 미술관으로 유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RM의 팬 사이에선 ‘RM 투어’가 인기다. RM의 동선은 ‘성지’가, RM이 사진을 찍은 곳은 ‘포토존’이 되고 있다. 방탄소년단 팬들은 이미 ‘RM 전시투어’를 따라가며 인증샷을 남긴다. 로제의 영향력도 상당했다. 사진 몇 장에 팬들이 들썩였다. “로제 따라 리움에서 찍은 사진” “로제가 다녀간 리움 재개관전에 가려고 예약하려는데 이미 꽉 차 갈 수가 없다”는 호소까지 올라온다.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는 “RM과 같은 스타들이 방문해 MZ 세대를 미술관으로 유입하는 것은 물론 인증샷 촬영과 같은 새로운 관람문화도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지드래곤이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공개한 집 사진에는 곳곳에 다양한 미술품들이 걸려 있다. [지드래곤 인스타그램 캡처]

K-팝 스타들의 ‘미술 사랑’이 알려진 것은 비단 최근의 일은 아니다. 이미 RM 이전에 빅뱅의 지드래곤과 탑(TOP)이 있다. 두 사람은 미술계에 ‘미린이(미술+어린이)’를 끌어들인 첫 스타였다. 지드래곤은 2019년 미국 유명 미술지 아트뉴스가 선정한 ‘주목해야 할 미술 컬렉터 50인’에 꼽힐 만큼 미술에 대한 안목과 애정이 깊다. 과거 제주에서 운영한 카페에는 미국 유명 작가 제프 쿤스의 설치미술작품, 독일 추상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이 있기도 했다. 박경린 전시공간리플랫 디렉터는 “빅뱅의 지드래곤, 탑과 같은 스타는 ‘아이돌 컬렉터’의 가장 크고 중요한 첫 사례였다”며 “이들을 통해 미술관이 낯선 곳이 아니라는 인식이 생겼고, 미술에 대한 진입장벽이 낮아지는 계기가 됐다. 지드래곤 등이 토대를 마련했고, 현재의 RM으로 이어져 미술에 관한 관심이 더 넓게 확산될 수 있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2015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연 ‘피스마이너스원: 무대를 넘어서’ 전시 준비 당시의 지드래곤. [YG엔터테인먼트 제공]

지드래곤은 미술품 수집을 넘어 전시도 했다. 2015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연 ‘피스마이너스원: 무대를 넘어서’ 전시다. 국내외 현대미술작가 14인이 지드래곤의 교감을 통해 만든 설치, 조각, 사진, 페인팅 등을 작업해 200여점이 전시됐다. 대중음악가수와 순수미술작가가 협업해 국내 대표 미술관에서 전시를 한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였다. 전시를 기획한 박경린 디렉터는 “큐레이터로서 도전과 실험이었고, 고민이 많은 전시였는데, 지드래곤의 ‘나를 통해서라도 현대미술이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민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메르스 상황에서도 폭넓은 세대의 관객이 찾았고, 지드래곤을 계기로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2015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연 ‘피스마이너스원: 무대를 넘어서’ 전시 준비 당시의 지드래곤. [YG엔터테인먼트 제공]

K-팝 스타들의 적극적인 관심을 통해 ‘미술품 수집’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최근 막을 내린 ‘키아프 서울 2021(Kiaf SEOUL 2021·한국국제아트페어)’엔 역대 최대 관람객(8만8000여명)이 몰려, 역대 최고 매출(650억원)을 기록했다. 이 행사엔 방탄소년단 RM, 뷔 등의 스타도 방문했다. 미술계 관계자들은 “미술품 수집은 몇 년 전만 해도 재벌이나 고소득층의 전유물, 사치품으로 여겨졌으나 연예인이나 K팝 스타들이 미술품 수집에 관심을 보이며 인식이 달라졌다”고 입을 모은다. 미술시장에서 지갑을 여는 MZ세대가 고가의 작품 수집에 몰두하는 것도 아니다. 소비의 취향이 분명하다. 한국화랑협회는 “이번 키아프에서도 특정 작가, 특정 갤러리 중심을 넘어 모든 작품이 고루 잘 팔렸다”고 말했다. 한 갤러리에 따르면 12개월 할부로 작품을 구매하는 대학생들도 적지 않다. 박 디렉터 역시 “10여년 전인 2008년 전후만 해도 미술시장은 투자의 목적이 컸지만 이제는 그림을 소비하는 즐거움에 더 초점이 맞춰 있다”며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미술품을 구입하기도 하고, 공간을 즐기는 것을 목적으로 미술관을 방문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베네치아의 윤형근 전시를 관람한 RM. [BTS 트위터 캡처]

전문가들은 K-팝 스타들의 미술시장 유입은 여러 면에서 긍정적 효과가 크다고 강조한다. 홍경한 미술평론가는 “예술에 대한 접근을 수월하게 하고, 이들을 통해 유입된 새로운 세대가 미래의 미술애호가이자 컬렉터로 성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다만 우려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스타들의 취향만 좇는 ‘예술에 대한 편식화’나 ‘목적성이 뚜렷한 시장미술 활성화’ ‘관람 형식에 대한 편견’(홍경한 평론가)을 심어줄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미술계에선 이러한 이유로 “방탄소년단 RM은 선한 영향력의 사례이자, 자신이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인지하고 행동하는 진지한 애호가, 컬렉터”라고 말한다. 장르, 작가를 불문하고 한국미술, 전통문화를 섭렵하며, 단지 취향 중심이 아닌 공부하는 모습도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에 따르면 RM은 한국미술사 100년을 조망한 ‘한국미술 1900-2020’의 발간 첫날에 직접 미술관을 방문해 사가기도 했다. 지난해 자신의 생일엔 “미술책 읽는 문화 확산에 일조하고 싶고, 산간벽지 청소년들도 미술책을 보면서 예술적 감수성을 키웠으면 좋겠다”며 국립현대미술관에 1억원을 기부했다.

미술계에선 “방탄소년단 RM은 선한 영향력의 사례이자, 자신이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인지하고 행동하는 진지한 애호가, 컬렉터”라고 말한다. 장르, 작가를 불문하고 한국미술, 전통문화를 섭렵하며, 단지 취향 중심이 아닌 공부하는 모습도 보이기 때문이다. [방탄소년단 트위터 캡처]

홍 평론가는 “(RM처럼) 관람을 넘어 시선이 집중된 K-팝 스타들이 미술관을 찾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영향을 주는지 각자의 철학을 겸비한다면 더 큰 시너지가 나고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리라고 본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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