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레져
붉은 잎·붉은 꽃·붉은 바다...내 마음도 붉도다
라이프| 2021-10-26 11:36
태안 운여해변 해넘이는 하루 두번의 명품을 제공한다. 사진은 솔숲과 라군에서 찍은 1탄. 2탄은 2~3분후 둑방너머에서 지평선과 풀등, 섬을 배경으로 이어진다.
태안유류피해기념관 입구에 설치된 명예의전당 등재 장비
옷점 갯벌의 연인들
꽃지의 코리아플라워파크
청산수목원의 ‘사랑의 불시착’ 촬영지

남미 칠레 처럼 긴 지형의 태안에는 이 가을, 아르헨티나 초원의 팜파스 글라스도 있고, 이탈리아 사이프러스, 열대 아메리카의 천일홍, 중국 남부가 원산인 황금측백도 산다.

태안해안국립공원의 푸른 생태를 붉게 물들이는 낙조는 국내 최고라고 해도 이의를 달 사람이 적다. 특히 태안 운여의 낙조는 국내외 전문가 그룹의 유명세를 탄 삼척 솔섬 닮은 곳도 있고, ‘바닷물 건너 바다’로 표현되는 풀등 해변을 물들이는 석양까지 가져, 일거양득의 매력을 뽐낸다.

▶14년전 영웅들을 모십니다=스테디셀러 꽃지는 같은 고을 내에 경쟁자들의 인기가 높아지자 ‘꽃보다 소년’, 풍차, 크렘린궁이 있는 코리아플라워파크를 만들어 세계의 꽃들로 새롭게 시선을 끈다. 해안국립공원 태안이 쌀쌀해질 때 더 그리워지는 꽃과 뜨끈한 미식을 앞세워, 이제 여행을 본격화한 국민들에게 손길을 내민다.

요즘 미국이 한국 처럼 하지 못해 바다기름을 제대로 제거하지 못하는 가운데, 14년전 국민 123만명과 함께 기적같이 기름 때를 지워내 뒤 자원봉사 국민에게 큰절을 올렸던 태안군민들은 그때 함께 땀흘린 영웅들을 모시고 싶다면서, 천리포 유류피해극복기념관에 있는 ‘명예의전당’에 일일이 등재해줄 것을 간곡히 당부했다.

▶사랑의 불시착, 고흐, 팜파스 청산수목원=세계적인 K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 현빈과 손예진이 자전거 데이트를 즐기던 곳은 ‘고흐의 다리’가 가로놓여진 청산수목원 둑방길이다. 남면 연꽃길에 있는 청산수목원은 사람 키의 2배 정도 되는 남미 억새 ‘팜파스그라스’가 이 가을 절정을 이루고 있다.

수목원 초입부터, 사이프러스와 팜파스글라스, 핑크뮬리가 여행자들을 반기며 해외여행 온 기분을 들게 한다.

사랑의 열매 호랑가시나무를 빼닮은 홍가시나무는 붉은 열매 대신 붉은 잎을 선보이며 열정을 뽐내고, 쌀쌀해 질수록 꼿꼿하게 버티는 앵초가 당차다. 부처꽃, 창포, 부들, 자라풀을 비롯한 600여종의 희귀식물이 자란다. 삼족오 미로공원, ‘만종’, ‘이삭줍기’등을 입체조각상으로 배치한 밀레의 정원, 고갱의 정원, 만다라 정원도 있다.

▶꽃의 도시 태안= 이제는 슬픈 전설을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꽃지 할머니-할아버지 바위는 요즘 가을 꽃놀이에 푹 빠졌다. 코리아플라워파크엔 고흐가 존경하던 요하네스 베르메르 선배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고흐를 배우고 피카소와 친구였던 앙리 마티스의 ‘피리 부는 소년’, 러시아 크렘린궁, 네덜란드 풍차 사이사이로 이국적인 기화요초가 방창하다.

오는 31일까지 열리는 가을꽃박람회의 대표선수는 천일홍, 천사의 나팔, 안젤로니아 등이다. 열대식물전시관에서는 쌀쌀해진 계절과 무관한 열대식물이 자란다. 가든 센터에서 다양한 색의 국화와 튤립, 씨앗을 살 수 있다. 주말엔 트랙열차가 다닌다.

근처엔 태안의 금강송(안면적송)이 우람하고 빼곡이 들어찬 안면도수목원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기증한 아산정원 품은 안명도자연휴양림이 있는데, 지하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본다.

이 소나무는 궁재로 쓰여 왕실의 특별관리를 받았다. 금강송이 있는 고성-삼척-울진은 멀어 이동과정에서 변질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한양 일부 전각, 거북선 등을 만들 때 안면 적송을 썼다고 한다.

정주영 회장이 기증한 아산정원은 교육적 활용도가 뛰어난 생태습지원, 지피원, 식용수원 등의 테마원을 갖고 있다. 안면수목원의 ‘별을 꿈꾸는 나무’라는 설치미술을 지나 안면정에 오르면 태안 중남부 해안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일거양득 운여 낙조=해안은 걸어야 제맛이다. 태안의 바람불어 좋은 날은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북쪽 신두리와 태배길, 남쪽 영목~운여 간 바람길이다.

바람길은 점심 먹고 영목에 와서 걷고 걷다 운여-황포항에 가서 석양을 보는 명품 갯벌길-데크길-솔숲길이다. 그 역순도 좋다. 운여의 매력에 취했기에, 와락, 그 곳 부터 자랑하고 싶다.

황포항과 그 앞 갯벌, 장곡리 염전, 딴똥문이산, 장곡저수지, 장삼포해수욕장 등 반경 4㎞ 이내 다양한 생태-문명 환경에 둘러싸인 운여해변의 방풍림과 물 건너 물 풀등형 백사장은 아는 사람만 아는 절경이다. 낮의 이곳 백사장은 빛이 난다. 규사성분이 많기 때문이다. 국내 유리생산 원료로도 쓰인다고 한다.

지도를 펴놓으면, 바다쪽 둑방 위 방풍림을 낀 운여 해안가 작은 라군은 ‘용의 눈’ 같다. 해질 무렵 해송 병사들이 도열한 방풍림 군대가 라군의 수면에 반사되는 모습을 앵글에 담는다. 같은 것을 자꾸 찍는다는 건 가슴이 놀랐다는 증거다. 그러나 지체할 새가 없다. 이게 다가 아니므로.

곧바로 몇십m 언덕 너머 풀등 백사장에 가면, 지중해 쪽으로 가야 한다며, 내일 또 오겠다며, 서서히 해수면 아래로 사라지는 태양의 붉은 작별을 만난다. 매일 벌어지는 이별인데도 마음이 허하다. 온통 붉은 세상 속 실루엣은 누가 서 있어도 배우가 된다. ‘눈물에 옷자락이 젖어도...고요히 잡아주는 손 있어...’ 정태춘의 멜랑꼴리한 ‘서해에서’ 노래가 조건반사적으로 읊조려진다.

운여 남쪽의 조개부리마을로 불리던 옷점항은 군산항과 옷감교역이 활발히 이뤄지면서 바뀐 이름이다. 매년 정월대보름이면 주민들이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조개부르기’를 했던 곳이다. 옷점 바위섬 인근에선 잿빛 갯벌을 배경으로 원색 패션의 연인들의 채도대비 사진놀이를 하고 있었다.

▶희망시대, 123만명의 기적 체험=만리포해변 근처의 유류피해극복기념관은 필수코스다. 특히 123만명과 그 자녀, 가족들은 꼭 가봐야할 곳이다.

IMF구제금융기 금모으기에 비견되는, 14년전 대한민국 국민 123만명의 대역사였다. 검은 기름띠는 1년도 안돼 사라지고, 바지락이 죽는 일은 1년반 만에 급감했으며, 눈에 보이는 흔적은 사라져 관광지가 복원된 것은 사고난 지 5년 만에 이뤄졌다. 세계 학계에서는 전무후무한 기적이라고 평했다.

기념관 내, 태안 주민대표 수백명이 국민들에게 감사의 큰 절을 올리는 모습, 검은 벽이 점차 흰벽으로 변하면서 그 속에 123만명의 이름을 깨알같이 적어놓은 모습. 아빠 손 잡고 온 딸이 고사리손으로 기름을 닦아내는 사진이 뭉클하다.

지금 명예의 전당을 만들고 있는데, 이런 때 123만 자원봉사자들의 가족들은 태안 가서 멋지게 힐링하고, 건강한 음식 즐긴 뒤, 기념관 가서 본인 등재, 부모님 등재, 가족사진 등록을 정식으로 했으면 좋겠다. 동서고금 유일한 이 족적, 국가적 고난 극복의 의지를 품은 태안에선, 희망을 얘기하는 이 시국, 두툼하게 인문학을 흡입할 곳이 많다.

함영훈 기자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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