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헤럴드광장] 기술주권, 물고기를 잡아야 하는 이유
뉴스종합| 2022-03-23 11:33

1970~80년대 산업화 당시 정부의 경제개발계획과 떼려야 뗄 수 없었던 구호가 ‘기술자립화’였다. 예전 KAIST 50년사 편찬작업을 진행하면서 들은 얘기가 있다. 요즘은 노벨상, SCI 논문 타령이지만 그때는 KAIST에서 무슨 연구가 뉴스가 되면 기자들이 맨 먼저 국산화율이 몇 퍼센트냐고 물었다 한다. 선진국 기술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은 물고기를 잡는 법을 배우는 일이었다.

다시 기술자립화가 부상하고 있다. 이번에는 ‘기술주권’이라는 이름으로. 그 배경은 잘 알다시피 미-중 기술패권 경쟁이다. 냉전 종식 이후 전방위적인 세계화에 기반을 둔 미국의 일극(unipolar)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는 미-중 기술패권 경쟁은 국제정치·경제질서의 근본적인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5년 전 다보스포럼발 4차 산업혁명이 정부의 각종 기획문건을 장식한 것처럼 이제 기술패권이 각종 계획자료에 단골처럼 들어가는 수식어가 됐다. 패권국이 아닌 우리가 어떻게 기술주권을 확보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50년 전 전쟁의 폐허를 딛고 기술자립화로 산업화를 이룬 것처럼 인구나 경제 규모, 군사력에서 넘사벽인 두 나라의 패권 경쟁을 뚫고 기술주권 확보로 성장동력을 복원하고 경제안보를 보장하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의미한다.

사실 기술주권이라는 개념은 엄밀한 학술적 용어가 아니라 정책적 수요를 반영한 수사적 표현에 가깝다. 기술주권을 정의한 문서로 많이 인용되는 독일 프라운호퍼연구소의 2020년 ‘기술주권: 수요에서 개념으로’ 보고서 제목처럼 정책적 수요에서 이제 개념으로 발전 중인 용어다. 산업화 시기 기술자립화가 경제개발을 위해 이미 존재하는 외국의 기술을 습득하고 국산화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기술주권 확보는 경제 전반의 경쟁력, 보건이나 에너지 위기 등 사회적 수요, 국방안보와 같은 국가의 주권적 과제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해 기술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즉, 기술자립화는 경제개발이라는 단일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기술습득이라는 점에서 물고기를 잡는 법을 궁리하는 문제였지만 기술주권은 경제·안보·복지·보건 등 저마다 다른 이유와 필요성으로 그에 필수불가결한 기술을 획득해야 한다는 점에서 왜 물고기를 잡아야 하는지, 어떤 물고기를 잡을지를 궁리해야 하는 문제다.

4차 산업혁명의 진가가 아이러니하게도 ‘산업’혁명을 넘어 ‘사회’혁명(전 사회 영역의 디지털전환)에 이르러 전면적으로 발현되는 것처럼 기술주권의 진가는 ‘기술’주권에 앞서 ‘국가’주권의 문제에서 출발할 때 제대로 드러난다. 베를린장벽 붕괴 후 체제 경쟁의 종식을 고한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저작 ‘역사의 종언’이 발간된 지 한 세대 만에 신냉전, 나아가 열전(熱戰)이 어른거리고 있다. 우리와 같은 비패권국이 국가의 존립과 안녕을 기하기 위한 주권적 과제는 무엇인가? 기술주권 확보 노력이 산업계나 연구개발계의 문제만이 아니라 유구한 국제정치 역사가 가르쳐주듯이 자조(self-help)라는 냉혹한 국제 시스템에서 같은 영토에 거주하는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주권적 과제라는 국민적 공감대가 없다면 지난 시절 정부 주도 선택과 집중으로 전략기술이라는 미명하에 특정 분야를 밀어주는 시대착오적인 기술자립화 운동으로 전락할지 모른다.

김소영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nbgkoo@heraldcorp.com

랭킹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