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우리는 뮤지컬 배우의 땀을 배신하지 않는다”…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 프로듀서
라이프| 2022-06-23 10:12
올해로 40년째 공연계에 몸 담고 있는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 프로듀서는 스스로를 ‘연극쟁이’라고 부른다. “연극을 잘 만드는 팀이 뮤지컬을 잘 만든다는 생각”으로 “해마다 연극, 뮤지컬을 두 편씩 무대에 올리는 것을 경영 철학”으로 삼아 건강한 공연 생태계와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상섭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6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르는 ‘햄릿’(7월 13일~8월 13일까지, 국립극장)의 배우들이 모여 한 마디씩 했다. 배우 손숙은 최근 열린 간담회에서 “박명성 대표 프로듀서가 제정신이 아니”라며 걱정스러운 얼굴이 됐다. 유인촌은 “제작사인 신시컴퍼니가 무너지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말해 현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제작을 해본 경험으로는 국공립이나 시립이 아니라면 이런 연극을 올리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는 설명이다. 수십년간 무대에서 살아온 거장 배우들의 눈빛에서 염려와 함께 벅찬 감동도 따라왔다. 유인촌은 “젊은 배우들과 평생 연극 무대에 몸 바친 어른들이 함께 하는 이런 무대는 어릴 적 외엔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모두가 혀를 내두르는 일이었다. “한 달동안의 공연이 매진된다 해도 제작비를 맞출 수 있을지 의문”(유인촌)이라고 한다. 투자 대비 수익은 맞출 수 없다는게 현장과 업계의 증언이다. 그런데도 이름만으로도 존재감이 강력한 원로배우부터 신진 배우까지 한 자리에 모았다. 1962년 연극 ‘페드라’로 데뷔한 배우 박정자부터, 2010년 뮤지컬 ‘맘마미아!’로 데뷔한 박지연까지…. 무대는 50년의 간극을 뛰어넘었다. 최근 서울 서초구 사옥에서 만난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 프로듀서는 “장인정신으로 똘똘 뭉친 인간문화재 급의 대배우들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도 행운 아니겠냐”며 웃었다.

연극 '햄릿'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거장 배우들은 저마다 “제작사인 신시컴퍼니가 무너지지 않도록 도와달라”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국공립기관도 아닌 민간 제작사에서 세대를 아우르는 배우를 모으고, 투자 대비 수익도 나지 않는 전통 연극을 올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 나온 농담 섞인 우려였다. [신시컴퍼니 제공]

“평생 무대에서 살아오신 선생님들이 매일 아침 ‘나 연극하러 갈게’하고 말하며 집을 나설 수 있다는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에요. 연습실에 들어오는 선생님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그는 스스로를 ‘연극쟁이’라고 부른다. 땅끝마을 해남에서 자라 차범석 작가의 ‘산불’을 보고 연극과 사랑에 빠졌다. 운명처럼 그의 걸음은 대학로로 향했다. 극단의 연수단원으로 짧은 배우 생활을 하다, 한국의 공연시장을 움직이는 제작자가 됐다. 박명성 대표 프로듀서가 이끄는 지금의 신시컴퍼니는 극단 ‘신시’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 프로듀서. 이상섭 기자

■ ‘햄릿’부터 ‘아이다’까지…연극 뿌리 위에 뮤지컬

신시컴퍼니는 독특한 공연제작사다.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국내 대형 뮤지컬 제작사로 ‘스테디셀러 라인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해마다 연극을 무대에 올린다. “연극을 잘 만드는 팀이 뮤지컬을 잘 만든다는 생각”으로 “한 해에 연극, 뮤지컬을 두 편씩 균형있게 올리는 것이 신시만의 경영 철학”이다. 박 대표 프로듀서의 신념이 반영됐다.

“연극을 기본에 두고 뮤지컬을 병행할 때 더 건강한 컴퍼니, 정신이 있는 컴퍼니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봐요. 현실적으로 보면 상업적인 뮤지컬만 했을 때 수익이 더 높아요. 하지만 연극과 뮤지컬이 동등하게 발전해나갈 때 공연시장도 컴퍼니도 건강해진다고 생각해요. 물론 어려워요. 그러니 그만큼 맷집 있는 컴퍼니가 될 수 있고요.”

올해는 박 대표 프로듀서가 공연계에 접어든 지 40년이 되는 해다. 그는 국내 뮤지컬 산업의 성장을 이끈 1세대 제작자다. 지난 긴 시간 무수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봤다”. 흥행 참패 기록들이야 숱하다. 그럼에도 “아무리 힘든 일도 지나고 나면 평범한 일”이라 생각하며 정도(正道)를 향해 걸었다.

뮤지컬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1999년이다. 그의 등장과 함께 우리 공연계는 ‘새로운 판’이 만들어졌다. 박 대표 프로듀서는 브로드웨이 작품을 무단으로 베끼던 기존 관행을 벗어나 ‘건전한 시장’ 구축을 위한 시도부터 시작했다. 첫 작품이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무대에 올린 브로드웨이 라이선스 뮤지컬 ‘더 라이프’다. 이 작품의 흥행을 계기로 신시컴퍼니에선 ‘맘마미아!’, ‘아이다’, ‘시카고’, ‘빌리 엘리어트’ 등 ‘효자 상품’을 냈다.

국내 최장수 뮤지컬 ‘시카고’는 지난해 공연 25년 사상 역대 최고 인기를 모으며 같은 시기 올라간 공연들 가운데 티켓판매율 1위를 기록했다. [신시컴퍼니 제공]

국내 최장수 뮤지컬 ‘시카고’는 지난해 공연 25년 역사상 역대 최고 인기를 누렸다. 이 작품은 유튜브, SNS에서 ‘복화술 밈’까지 만들어내며 20대의 젊은 관객을 공연장으로 이끌었다. 팬데믹 기간 중 공연계에 불어닥친 ‘하나의 사건’이자, 신시컴퍼니의 저력을 입증한 사례였다.

탁월한 선구안으로 공연계의 트렌드를 이끌었지만, 그는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무대에 올리는 작품마다 우연히 관객이 요구하는 트렌드와 맞았다”는 것이다. 단지 “최대한 정직하게, 최선을 다해” 작품을 만들 뿐이다.

“‘시카고’는 보물 같은 작품이에요. 한 번도 흥행에 성공하지 않은 적이 없는 ‘흥행불패’죠. ‘아이다’도 마찬가지고요. 어떻게 보면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힘든 시기가 있다가도 ‘시카고’와 ‘아이다’로 숨통이 트여요. 흥행 실패를 하면 인기 뮤지컬로 만회해 그 수익을 다시 투자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러다 또 힘들어지면 다시 ‘시카고’나 ‘아이다’를 올리고요. (웃음)”

실험과 도전에 주저하지 않았고, 연극과 창작 뮤지컬 투자에 망설이지 않았다. 박 대표 프로듀서의 경영 철학은 공연계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데에 의미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

뮤지컬 ‘아이다’의 출연 배우들 [신시컴퍼니 제공]

■ “뮤지컬 배우들의 땀을 배신하지 않는다”…건강한 생태계 구축

공연계에 몸 담은 40년간 그는 스스로에게 무수히 많은 질문을 던졌다. “어떤 제작 시스템으로 가야 하는지, 지금의 경험이 미래엔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지금 왜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려야 하는지 끊임없이 반복된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아갔어요.”

신시컴퍼니는 라인업은 물론 제작 시스템에서도 여타 제작사와는 조금 다른 길을 간다. 소위 말하는 톱스타 출연자를 섭외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오디션을 통해 배우를 선발한다. 소녀시대 출신 티파니도 당당히 오디션을 통해 ‘시카고’ 합격 티켓을 따냈다. 오래 숙성된 인기 뮤지컬 역시 공연이 출발할 당시 “인지도가 없는 배우들이 출연했기에 흥행에는 확신이 없었다”고 한다. 강력한 ‘티켓 파워’를 가진 배우들이 욕심날 법도 한데, 굳이 지름길을 가지 않았다.

“뮤지컬의 미래는 뮤지컬 전문 배우들에게 있어요. 스타를 꿈꾸며 앙상블부터 시작해 자신의 무수히 많은 시간과 비용, 청춘을 투자하고 나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이죠. 신시컴퍼니만큼은 그런 후배 뮤지컬 배우들의 땀과 열정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나도 열심히 하면 되는구나’, ‘오디션을 통해 조역도, 주역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어요.”

국내 뮤지컬 시장은 2001년 한국에 상륙한 ‘오페라의 유령’을 계기로 일대 변화를 맞으며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빠른 성장을 거친 업계의 그림자는 짙었다. ‘티켓 파워’ 높은 스타들에 대한 의존도는 점점 높아졌고, 그로 인해 주조연 배우들의 간의 출연료 격차와 대우 문제가 빚어졌다. 제작 과정의 온갖 불합리가 봇물 터지듯 튀어나왔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선 160분의 러닝타임 중 어린이 주인공인 빌리가 무대 위에서 춤추고 연기하는 시간은 140분이나 된다. 완벽한 빌리를 보여주기 위해 네 명의 빌리가 준비한 시간은 무려 1만 3488시간이다. [신시컴퍼니 제공]

박 대표 프로듀서가 가고자 하는 길은 ‘건강한 생태계’ 구축에 중심을 두고 있다. 그는 “신시는 스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뮤지컬의 교과서적 시스템”으로, “오로지 작품으로 승부하는 괴짜 근성”으로 무대를 만든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신시컴퍼니의 오랜 전통이다.

“매작품 새로운 스타를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작품을 통해 스타를 만들고 싶어요. 모두 배우를 스타로 만들어주진 못하겠지만, 일년에 한두 명이라도 만들어야죠. 철저하게 오디션을 통과한 사람들이 작품에 합류해 뮤지컬 전문 배우와 인기있는 스타가 똑같은 대우를 받고 무대를 만드는 것이 저의 신념이에요. 평생을 무대만 지키고 노력하는 배우들에게 상실감을 주고, 갈등의 골을 넓힐 순 없어요.”

멀고 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연습기간, 제작기간이 다른 작품의 두 배 이상 걸리고 공력도 많이 드는 ‘빌리 엘리어트’와 ‘마틸타’ 등의 작품을 선보였다. 어린이 배우들이 일 년 넘게 연습 기간을 거쳐야 하는 ‘빌리 엘리어트’는 무대 곳곳에서 배우, 스태프의 수많은 땀과 노력이 전달된다. 수차례의 오디션을 거쳐 선발된 아역 배우들이 수개월의 트레이닝 기간을 거치니, 뮤지컬 제작사는 ‘영재 육성 기관’의 역할까지 한다.

“너무나 어린 배우들이 매일 나와 땀 흘리며 연습을 해요. 공중에 매달려 춤을 추고, 어른도 힘든 탭댄스에 감정연기, 노래까지 해야 하죠. 어려운 환경이지만, 이렇게 하나 하나 만들어 가는 것이 미래 예술가와 인재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과정이에요.”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 프로듀서. 이상섭 기자

■ ‘가장 낮은 곳’에서 돌아보는 제작자의 마음

박 대표 프로듀서의 마음엔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과 경의가 담겨 있다. 그의 좌우명은 ‘가장 낮은 곳에서 먼 꿈을 꾸는 사람’이다. “내가 아래에 있어야 다른 곳이 보인다”며 “그것이 연극에서 필요한 정신”이라고 말한다. 그 마음으로 가장 곁에 있는 스태프의 처우와 그들과의 협업, 무대에서 땀 흘리는 배우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그는 “책으로 치면 내 삶은 150페이지 정도까지 온 것 같다”고 했다. 공연계의 ‘맏형’으로 연극과 뮤지컬의 균형있는 발전을 이끌었다.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탄탄한 고정팬을 확보했고, 특정 세대가 아닌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작품으로 관객 확장에도 힘썼다.

그는 “이젠 후진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조력자가 되는 시기”라고 했다. 오랜 시간 한 곳을 바라본 철학과 신념이 유산이 돼 새로운 꽃을 피우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공연계, 한국 뮤지컬과 연극의 미래를 위해선 프로듀서가 이 시대의 흐름이나 미래에 대한 안목, 어떤 정서와 전통성을 갖고 작품을 만드느냐가 중요해요. 우리 작품을 통해 새로운 스타와 인재를 발굴하고 키워가며 건강한 공연시장을 만들어가는 것이 저의 사명이에요.”

제작자로 꾸는 꿈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세상을 놀라게 할 작품에 대한 열망은 여전하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연극쟁이로 살면서 모험도 하고, 도전도 했어요. 성공과 실패를 반복했고요. 한 시대의 작품 트렌드를 혁신적으로 뒤엎는 작품, 나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는 작품에 대한 꿈은 남아있어요.(웃음)”

shee@heraldcorp.com

랭킹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