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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서 자유를 꿈꾸다…하이디 부허 [어떤 울림]
라이프| 2023-04-02 07:51
하이디 부허, ‹신사들의 서재 스키닝›, 1978, 싱글 채널 16mm 필름 (컬러), 음향, 4:3. 13’47’’, 촬영: 인디고 부허, [하이디 부허 에스테이트 제공]

[헤럴드경제=이한빛 기자] 전시장에 들어서니 ‘촤아악’하고 무언가 뜯기는 소리가 난다. 일정한 간격으로 들리는 소리는 ASMR(자율감각 쾌락반응)처럼 느껴진다. 소리의 근원은 영상. 한 여자가 온 힘을 다해 벽의 껍질을 뜯어내고 있었다. 두 손으로 뜯어지지 않자, 힘껏 매달리다 그것도 부족한지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온 몸을 던져 벗겨냈다. 그렇게 떨어져나온 껍질들이 허물처럼 쌓였다. 그 안에서 여자는 부활하듯 일어섰다.

스위스 아방가르드 작가 하이디 부허(Heidi Bucher, 1926-1993)의 작업 과정이다. 그는 특정한 공간 전체 벽에 부레풀을 섞은 거즈 천을 덮고 고무나무에서 추출한 액상 라텍스를 바른 후, 건조되어 굳어지면 이를 물리적인 힘으로 벗겨냈다. ‘스키닝(skinning)’이라고 명명된 이 작업을 통해 새로운 피부를 만들고, 그를 떼 냄으로서 공간과 시간, 삶과 생명을 조각적으로 탐구한다.

아트선재센터, 〈하이디 부허:공간은 피막, 피부〉전 전시전경, 2023 [이한빛 기자]
모더니즘 조각사의 게임 체인저

부허가 활동했던 스위스는 무척이나 가부장적이었다. 여성 참정권이 인정된 것이 1971년이었으니 부허는 50년 가까운 시간을 정치·사회적 ‘비(非)존재’로 살았다. 1944년부터 1947년까지는 취리히 미술공예학교에서 바우하우스 출신의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 막스 빌(Max Bill), 엘시 지오크(Elsi Giauque)에게 배웠다. 이때 작업한 초기 실크 콜라주에서는 색채와 조형에 대한 작가의 실험이 돋보인다. 예술에 대한 본질적 의미에 흥미가 있었음이 엿보인다.

이처럼 부허는 여유있는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으나, 남녀의 구분이 명확한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서재는 남성들의 영역이었고 부엌은 여성들의 공간이었다. 숨막히게 엄격한 구분에 결혼이 탈출구 였을까? 부허는 예술적 동료이자 반려자였던 칼 부허(Carl Bucher)와 결혼해 1969년 캐나다 몬트리올로 이주한다. 1970년대 초에는 뉴욕, 캘리포니아 등에서 조각, 건축, 디자인, 퍼포먼스 등 장르를 융합한 새로운 조각적 시도를 선보였다.

안드레 리소니(Andrea Lissoni) 하우스데쿤스트 관장은 부허를 모더니즘 조각사의 ‘게임 체인저’(game changer)라고 평한다. 돌이나 철과 같은 무겁고 반영구적 재료로 거대 스케일로 작업하는 기존 조각의 개념 자체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부허는 남편과 함께 ‘입을 수 있는 조각’(wearable sculpture)시리즈를 선보인다. 거리를 걸어다니며 입을 수 있고, 옮길 수 있는 ‘랜딩스 투 웨어(Landings to wear·1969-1970)’가 이 연장선상에 있다. 이후 의류 조각적 변형작품 ‘바디쉘’(1972), ‘바디래핑’(1972)를 발표하며 조각은 단단하고 고정된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신체와 함께 유동적으로 변하는 새로운 조각형태를 제시했다.

‹잠자리의 욕망(의상)을 입은 하이디 부허 취리히›, 1976, 사진: 토마스 발라, [하이디 부허 에스테이트 제공]
피부를 벗겨내는 건 관습과 강요로부터 해방되는 것

1970년대 초 하이디 부허는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스위스로 돌아온다. 그리고 취리히 정육점 지하에 오픈한 자신의 스투디오에서 그는 잠자리 형태의 조각 작업 ‘잠자리의 욕망’(1976)을 만든다. 애벌레에서 변이를 통해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가는 잠자리가 그에겐 자유와 해방의 상징이었다. 자신을 가두는 모든 것에서 그는 자유를 꿈꿨다. 이후, 누군가의 아내와 딸이 아닌 예술가로 자신의 주체성이 실현되는 공간인 자신의 작업실을 스키닝한 뒤 설치한 보그(Borg·1976)를 기점으로 그의 조각은 설치로 전환한다.

다음 스키닝의 대상은 너무나 가깝고 사랑하지만 또 굴레였던 가족. 부허는 1978년 아버지와 남자형제들의 공간이었던 서재를 스키닝한다. 작가는 “공간은 피막이고 피부이다. 피부를 벗겨내는 것은 과거로부터, 표시된 것으로부터, 관습과 강요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한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바라던 해방은 모든 것을 불태우는 그라운드 제로는 아니었던것 같다. ‘신사들의 서재 스키닝’(1978)작업 당시, 아들인 인디고와 나눈 인터뷰 영상에서 그는 “(스키닝을 하면) 내 마음 호수에 던질거다. 그래서 그 끝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아트선재센터, 〈하이디 부허:공간은 피막, 피부〉전에 설치된 잠자리의 욕망(의상), 2023. 이번 전시를 마지막으로 해당작품은 MoMA의 컬렉션이 된다. 수장고에 들어가면 앞으로 수 년간 직접 만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한빛 기자]

개인 단위의 해방은 곧 사회로 확장한다. 1988년작 ‘빈스방거 박사의 치료실’은 ‘히스테리아’(신경증) 환자들을 진단하고 치료하던 곳이었다. 단어 자체가 자궁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히스테라(Hystera)에서 유래했듯이,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히스테리아는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의학적으로 원인을 설명할 수 없는 병이었다. 발병하면 제대로 치료도 하지 않은 채 정신병원으로 보내는 등 인권침해가 빈발했다. 부허는 빈스방거 가문이 운영하던 이 벨뷰 요양원에 방문해, 치료실 전체를 스키닝한다. 이곳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여성에게 벌어진 그러나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를 기록하고자 하는 행위다.

미이라처럼 딱딱해진 스킨들…그사이 우리는 얼마나 변화했나
아트선재센터, 〈하이디 부허:공간은 피막, 피부〉전 전시전경, 2023 [이한빛 기자]

뜯어낸 스킨들은 공간의 형태 그대로 전시장에 걸렸다. 30년 넘게 지나 딱딱해지고 색상도 변했다. 미이라의 피부처럼 말라버린 느낌이다. 허물처럼 벗겨낸 제약들을 그녀는 멀리 날려보낸다. 그토록 자신을 꼼짝 못하게 옭아맸던 수많은 굴레들을 같은 힘으로 끊어내는 대신 가볍고 얇게 치환했다. 지붕위로 가볍게 날아가는 스키닝한 공간은 사이다같은 해방감마저 준다. 전시를 기획한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은 “하이디 부허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자유와 해방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작가는 생전엔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으나, 최근 몇 년간 여성주의가 급부상하면서 새롭게 조명됐다. 2004년 스위스 취리히 미그로스현대미술관 회고전을 시작으로 2013년 파리 스위스 문화원과 2021년 독일 뮌헨 헤우스데어쿤스트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2017년엔 베니스비엔날레에 작품이 출품되기도 했다.

이런 그의 예술적 페르소나를 만나볼 수 있는 전시는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아시아 첫 회고전이며, 1970~80년대 주요 작품을 비롯해 드로잉, 영상 등 130여점이 나온 대규모 전시다. 기간은 6월 25일까지.

vick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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