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잇 수다] TV로 보는 '시의 즐거움'…인생과 사랑의 파편들
기사입력 2017-09-12 12:18 작게 크게
[헤럴드경제 스타&컬처팀=문다영 기자] 참 식상하게도 머리가 먼저 기억하는 가을은 시집을 펼쳐들게 만든다. 시를 보는 눈이라곤 있지도 않으면서 괜스레 감성에 빠져드는 건 계절 탓인지도 모른다. 한낮의 뙤약볕과 선선한 저녁 바람. 완연한 가을이다. 요즘이야 직업별, 세대별, 상황별로 정리해 내놓는 시집이 워낙 많아 골라보는 재미도 넘쳐난다. 그래서 TV에 등장해 시청자들을 흔들어놓은 시들을 소개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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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방송화면

■ 엄마 홍은희를 울린 엄마 게장의 마음

엄마 홍은희가 울었다. 홍은희는 JTBC ‘학교 다녀오겠습니다’에서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과 수업을 듣다가 돌연 눈물을 흘렸다. 자작시를 짓기 전 소개된 시 판 편 때문이었다. 예능 프로그램 출연을 위해 교복을 입고 여고생으로 돌아갔지만 안도현의 시 ‘스며드는 것’을 읽다가 자신의 두 아들을 떠올리곤 흘린 눈물이었다. 홍은희는 방송 후 ‘그라치아’와 인터뷰에서 “정말 충격적이었다. 활자가 쑥 들어와서 내 몸이 온통 빨개지는 것 같았다. 애를 키우며 감정이 많이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를 울린 시는 안도현의 ‘스며드는 것’이다.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 안도현 ‘스며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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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천일의 약속' 방송화면


■ 생의 봄날은 참으로 찬란했고 덧없었다

빛나는 청춘이었지만 기억도 잃고 생명도 아스라져 가는 이가 있었다. SBS 드라마 ‘천일의 약속’에서 알츠하이머 환자를 연기한 수애는 이서연으로서, 김래원의 전 약혼녀를 만나 “꽃도 잎도 다 졌니라 실가지 끝마다 하얗게 서리꽃은 피었다마는 내 몸은 시방 시리고 춥다 겁나게 춥다 내 생에 봄날은 다 갔니라”라고 읊는다. 극중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이서연의 상황을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구절이었다. 꽃도 잎도 다 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서연이 봄날을 떠나 소멸로 향하는 외로움과 심적 고통이 그대로 드러났다. 비단, 극단적 상황에 놓이지 않은 이라도 삶의 봄날이란 참으로 덧없다. 봄날 꽃잎처럼 손에 쥐어지지 않다가도 어느 순간 들여다보면 온갖 환희와 설렘이 나도 모르는 새 지나가버린 씁쓸함이기도 하다.

“진달래
염병한다 시방, 부끄럽지도 않냐
다 큰 것이 살을 다 내놓고
훤헌 대낮에 잠을 자다니
연분홍 살빛으로 뒤척이는 저 산골짜기
어지러워라 환장하겠네
저 산 아래 내가 쓰러져불것다 시방

찔레꽃
내가 미쳤지
처음으로 사내 욕심이 났니라
사내 손목을 잡아끌고
초저녁
이슬 달린 풀보라잎을 파랗게 쓰러뜨렸니라
둥근 달을 보았느니라
달빛 아래 그 놈의 찔레꽃들,
그 흰빛 때문이었니라

산나리
인자 부끄럴 것이 없니라
쓴내 단내 다 맛보았다
그러나 때로사내의 따뜻한 살내가 그리워
산나리 꽃처럼
이렇게 새빨간 입술도 칠하고
손톱도 청소해서 붉은 매니큐어도 칠했니라
말 마라
그 세월 덧없다

서리
꽃도 잎도 다 졌니라
실가지 끝마다
하얗게 서리꽃은 피었다 마는
내 몸은 시방 시리고 춥다
겁나게 춥다
내 생애 봄 날은 다 갔니라.” - 김용택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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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2 '학교 2013' 방송화면


■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면…‘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며 피는 꽃이야말로 진짜 아름다움을 품는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 삶의 풍랑에 지친 모든 이들을 껴안는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은 ‘학교2013’의 명대사로 꼽힌다. 9회에서 인재(장나라)는 모둠수업 때 진행하지 못한 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을 읊어주며 지친 아이들을 향해 위로를 건넸다. 누구나 모두 흔들리거나 흔들릴 것이라는 사소한 위안을 전했다. 이 덕에 자살 직전까지 갔던 학생은 삶의 끄트머리에서 시 구절을 생각하고 발길을 돌린다. 그 학생은 “문득 생각났어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면서요. 선생님. 저도 그냥 흔들리고 있는 중 맞죠? 선생님도 그냥 흔들리고 계시는 중이죠? 다행이에요. 쌤이 계셔서”라고 말한다. 그렇다. 모두가 흔들리는 삶이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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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맨투맨' 방송화면


■ 드라마를 완성한 건 시였다

JTBC 드라마 ‘맨투맨’은 마지막회를 박노해의 ‘하늘’로 장식했다. 정의를 믿는 첩보원과 액션배우가 만나 약자를 지키고 폭력의 주체인 강자에 맞선다. 사랑을 품은 액션배우는 빠순이와 만나 서로의 가족이 되어준다. 특히 권선징악으로 귀결되는 ‘맨투맨’은 적재적소에 시구를 활용해 최고의 장면을 선사했다. 서글픈 노동자의 삶을 대변하지만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시이기도 하다.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프레스에 찍힌 손을 부여 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손을 붙일 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 선생님은
나의 하늘이다

두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끌려가
세상에 죄 한번 짓지 않은 우리를
감옥소에 집어넌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죄인을 만들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판검사님은
무서운 하늘이다

관청에 앉아서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관리들은
겁나는 하늘이다

높은 사람, 힘있는 사람, 돈많은 사람은
모두 하늘처럼 뵌다
아니,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이시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늘이 되나
대대로 바닥으로만 살아온 힘없는 내가
그 사람에게만은
이제 막 아장걸음마 시작하는
미치게 예쁜 우리 아가에게만은
흔들리는 작은 하늘이겄지

아 우리도 하늘이 되고 싶다
짓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
서로를 받쳐 주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 - 박노해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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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도깨비' 방송화면


■ 공유의 목소리가 배가시킨 감정의 폭풍

말이 필요없다. TV 속에서 가장 ‘심쿵’했을 그 장면. 드라마 ‘도깨비’를 장식한 김인육의 ‘사랑의 물리학’이다. 너무나 식상할 수 있지만 반대로 너무 유명해서 시 전체를 음미하며 읽어보지 않은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덧붙인다. 900년을 넘게 산 도깨비가 낙엽이 흩날리는 이국에서 저도 몰랐던 사랑을 느끼게 된 그 운명같은 순간, 더할 나위 없이 딱 맞아 떨어졌던 그 구절들. 공유의 목소리를 떠올릴 때 감정은 극대화된다.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 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 김인육 ‘사랑의 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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