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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쇼크] ①용기 낸 폭로에 따라붙는 '음모론', 그 실체는?
뉴스| 2018-02-22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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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KBS2 '마녀의 법정' 방송화면)


불길이 거세다. “#미투” “#With You” 성폭력을 더 이상 묵과하지 않겠다는 목소리와 이들을 응원하겠다는 지지가 대한민국을 휘감았다. 지난해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성폭력 폭로와 자성의 불길은 대한민국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다. 서지현 검사의 용기있는 폭로, 최영미 시인의 적나라한 시 뿐만 아니다. 정 ·재계는 물론이고 방송계, 예술계 너나할 것 없이 더 이상 성폭력을 참지 않겠다는 이들의 결단력 있는 행보가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이 현상이 본질적 문제 해결로 이어지겠느냐에 대해선 의구심을 갖는 이들이 많다. 반짝 현상에 그치지 않고 해결로 이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성폭력 앞에 왜 많은 이들이 묵인하고 참을 수밖에 없었는지, 어느 한 집단과 권력에 초점이 맞춰진 이슈로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함께 짚어봤다.-편집자주


[헤럴드경제 스타&컬처팀=문다영 기자] 점화는 서지현 검사였다. 서지현 검사는 지난 1월 29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안태근 전 검찰국장 성추행을 폭로했다. 그러면서 “범죄 피해자분들, 성폭력 피해자분들께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싶어서 나왔다. 그것을 깨닫는 데 8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이 말에 힘을 얻은 듯 각계각층에서 봇물 터지듯 성폭력 폭로가 이어지고 있다. 원로시인, 원로 연출가, 중견 배우 등 각 계층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의 가면이 차례로 벗겨지고 있다.

■ 문단, 방송가, 성역이 없다

방송가는 어떤가. 서지현 검사 폭로 직후 MBC PD A씨가 성추행 의혹에 휩싸였다. 그리고 당사자는 남녀구분없이 터치하는 습관이 있다며 사과의 입장을 밝혔다. 이후 줄줄이 방송가 성폭력 폭로가 이어졌다. 급기야 배우 조민기는 교수로 재직 중이던 학교에서 학생들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오 모 배우의 행적도 폭로됐다. 여기에 또 다른 중견 배우 B씨도 곧 성폭력 가해 사실이 터져나올 것이란 말이 나돌고 있다.

연극계는 쓰나미가 멈출 줄 모른다. 배우 이명행은 스태프 성추행 논란에 휩싸인 후 공연 중인 연극서 하차했고 오태석 연출가는 입장을 밝히려다 돌연 철회했다. 피해자 폭로로 성추행 사실이 알려진 이윤택 연출가는 19일 기자회견을 했지만 후폭풍이 거셌다. 성폭행은 없었다는 발언에 분노한 피해자가 상세한 폭로로 이윤택 연출가의 실체를 까발렸다.

문단도 아우성이다. 최영미 시인 시로 노벨문학상 후보에서 성추행범으로 추락한 고은 시인은 두문불출이다. 교과서에 실린 그의 작품도 제외가 논의되고 있는 상황이다. 문단 내에선 지난 2016년부터 트위터 등의 소셜미디어에서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되며 꾸준한 문제제기가 이어져 왔다. 그럼에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7일, 한국시인협회가 성추행 전력으로 교수직에서 해임된 전력이 있는 인물을 새 회장으로 선출한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이 일었다. 문단 내 성폭력 폭로 운동에 앞장서 온 탁수정 씨는 “2018년의 문단 상태가 바로 이것”이라 일침하기도 했다.

줄줄이 터져나오는 성폭력에 각계각층은 발 빠르게 대처하고 있다. 검찰은 진상조사위를 꾸렸고 방송가는 징계 조치로 성폭력에 대응하고 있다. 연극계는 하차와 극단지원 취소 등으로, 문단도 각종 혜택과 기념관들을 폐쇄하는 것을 고려 중이다. 정치권도 동참했다. 여당은 성평등 정책조정회의, 젠더폭력대TF책위로 적극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일 직장 내 성희롱 문제를 발본색원할 것을 지시하며 “만약 조직적 은폐나 2차 피해가 발생할 경우 기관장이나 부서장에게도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피해자가 2차 피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문제제기를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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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JTBC 방송화면)



■ 용기 낸 성폭력 폭로…다른 이유 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 중 이윤택 연출가와 배우 조민기는 사실관계를 축소하려다 역풍을 맞은 꼴이 됐다. 오히려 기존에 알려진 바보다 더 추악하고 충격적인 행각들이 쏟아진다. 피해자들이 자신의 치부라고 쉬쉬하는 대신 가해자들의 악행을 밝히겠다 발 벗고 나서고 있어 가능한 일이다. 여기에 오동식 등 피해자가 아님에도 불의를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내는 이들까지 더해지며 가해자가 숨을 곳은 사라졌다. 이는 분명 권력으로 본질을 흐리던 방식을 더이상 이어가지 못하게 하는 청신호다.

그럼에도 갈 길은 멀다. 성폭력 사실을 폭로한 피해자들에 의문부호가 꼬리표처럼 따라붙기 때문. 1월 29일, 서지현 검사가 7년 전의 일을 꺼낸 후 미묘한 반응이 일었다. C 의원은 사적인 자리에서 서지현 검사 폭로를 두고 “정계 입문을 꿈꾸는 것이 아닌가 싶다”는 말을 했다. 뒤늦게 용기를 낸 점은 존중하지만 사건으로부터 7년이나 지나서, 그것도 방송을 통해 이같은 일을 폭로한 것은 정치적 목적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그런가 하면 한 검찰 관계자는 가해자가 기억 못할 정도의 시일이 지난 뒤 폭로하는 것은 사실관계를 분명히 따지기에 너무 늦은 것이라 지적했다. 가해자에게도 피해자에게도 좋지 못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다. 피해자의 폭로를 두고 사건 자체보다 추측과 부정적 시각이 난무하고 있다. 서지현 검사 뿐 아니라 최영미 시인, 김보리씨(가명), 배우 김지현 송하늘 등에게도 어김없이 숨은 의도가 있었을 것이란 말이나 음모론이 뒤따른다. 2차 가해나 다름없다.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이 피해자가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당하거나 심리적 고통을 겪도록 만들고 있는 셈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김신아 활동가는 “피해자들 폭로에 다른 의도가 있었을 거라든지 등 부정적 시선이나 루머 양산은 그간 지속되어 온 사회적 편견이나 문화 속에서 비롯되는 행위들이라 볼 수 있다”면서 “이는 성폭력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방해하는 존재들이다. 이래서는 근본적인 접근이 나오지 않는다. 이같은 의심이나 생각부터 배제하고 사건 자체에 집중해야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된다”고 꼬집었다. 무엇보다 요즘의 ‘#미투’ 행렬이 이같은 편견어린 시선으로 얼룩져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김신아 활동가는 “이전에도 용기있는 폭로가 있어왔다. 여러 분야, 사회 곳곳에서 성폭력에 대한 ‘말하기’를 시도해 온 이들이 있었다”면서 “물방울이 모여 시내가 되고 강이 되듯 이같은 흐름들이 조금씩 모여져 현재의 상황을 만들었다. 서로가 말하는 흐름을 인식하고 주시해오며 ‘나도 말해야겠다’, ‘더 이상은 안된다’는 생각들을 하게 된 것 같다. 이 흐름에 어떠한 왜곡도 의심도 있어선 안될 것”이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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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SBS)



■ 줄어들지 않는 성범죄

또 성범죄는 때와 장소를 가려 일어나지 않는데다 가해자들의 행동에 별다른 죄의식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일례로 조직 내 상급자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저지르는 이른바 ‘갑질 성범죄’가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 이를 입증한다. 매년 증가 추세를 보였기 때문.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신보라(자유한국당) 의원에 따르면 경찰청 통계서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조직 내 성범죄는 2012년 341건에서 2014년 449건, 2016년 545건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2017년에는 8월까지 370건이나 발생했다.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는 것과 반대되는 수치는 자신의 행동을 범죄로 여기지 않는 가해자들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여기에 쉬쉬하는 분위기가 성범죄가 만연한 사회를 지속시킨다. 지난 2일 여성가족부의 성희롱 실태조사에 따르면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 7844명 중 0.6%인 47명만이 직장 내 기구를 통해 공식적으로 문제를 처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실시한 ‘성희롱 실태분석과 형사정책적 대응방안 연구’에서 성희롱 피해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의 54%는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고 답했고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이유로 응답자의 45.6%가 ‘상대와의 관계를 생각해서’라고 응답했다. 성희롱 피해자들 사이에서 ‘신고해도 별 달라질 게 없다’거나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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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YTN 방송화면)



■ 문화 속에 자리한 성 권력차가 빚어낸 비극

본질적인 문제는 더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바로 남성과 여성의 성(性) 권력 차이다. 이미 매스컴과 다양한 매체들이 오랜 세월 지속적으로 남성이 성적 우위에 자리하도록 해왔다는 것이다. 사회학자인 이나영 중앙대 교수는 “오랜 세월 방송, 영화, 책 등 다양한 경로의 문화 속에서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여성을 희롱할 수 있는 주체로 여겨져 왔다. 특히 남성이기에 잘못된 행동에 대해 관용의 대상이 되는 것이 문제다”고 꼬집었다. 그는 “한 시인이 ‘여자들은 이미 타살 당했다’고 하는데 사실적으로 이건 타살이다”면서 “성범죄 관련 전국실태조사를 보더라도 남성 피해자는 ‘그게 문제인지 몰랐다’는 답변이 압도적인 반면 여성은 ‘제대로 해결될 것 같지 않다’고 답했다. 결국 자신에게 오는 불이익 때문에 말을 못하는 것인데 이는 성 권력에서 오는 문제다. 혹자는 성범죄를 개인적 문제와 권력형 문제로 나누기도 하는데 성폭력은 기본적으로 구조적 문제다.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에 권력관계가 깔려 있는 것이다”라고 일침했다.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을 당장 근절할 수 있는 해결책은 없다. 피해를 본 당사자부터 문제를 인식해야 변화는 시작된다. “유별나다”며 소문에 편승하는 대신 당연히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는 의식이 형성되어야 한다. 여기에 더해 ‘남성이 본능이 빚어낸 실수’라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미투’의 바람이 어디까지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사회의 부조리한 일면을 바꿀 기회는 바로 지금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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