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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타타라타] 탁구로 엿보는 창의력의 비밀
뉴스| 2018-03-15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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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광고하라' 표지. 저자는 스스로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소개하고 있다.


# 광고인 박웅현이 쓴 ‘인문학으로 광고하다’는 꽤 좋은 책이다. 2008년에 1쇄가 나왔고, 개정판 없이 2018년 2월 46쇄를 찍었으니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자기계발서는 대개 유행을 타기 마련인데 10년이 넘게 읽히고 있다면 그 내용도 검증됐다고 할 수 있다. 책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인문학적 독서로 창의력을 키우자’이다. 즉, 책 제목에서 인문학은 독서, 광고는 창의력을 의미한다. 책에서 저자는 창의력을 “문제해결을 위한 상상력, 새로움, 고정관념 깨기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 창의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요구된다. 즉, 돈오점수. 문득 깨달음(돈오)의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점진적 수행(점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일본 여자탁구의 10대 스타 이토 미마(세계 5위, 18세)는 한국 탁구에 대해 조심스레 이렇게 말했다. “(한국선수들은)운동도 열심히 하고, 재능도 있는 것 같은데 플레이가 다 똑같아요.” 웬만한 한국 남자 실업 선수들과 맞붙어도 지지 않고, 세계 최강 중국의 턱밑까지 다다른 어린 일본 선수의 평은 꽤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맞다. 한국은 유난히 쏠림현상이 심한 나라다. 다르면(different) 틀리기(wrong) 쉽다. 여학생들의 획일적인 헤어스타일(혹은 롱패딩 같은 유행)이나, 조직문화, 그리고 진영논리 등에서 비슷한 감정이 느껴진다. 이런 쏠림 문화는 ‘금 모으기 운동’처럼 간혹 강점으로 표출되기도 하지만, 노벨상 후진국처럼 창의력 영역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는 문화는 자칫 몰개성의 위험이 있다. 생뚱맞게 스포츠 현장에서 한국의 창의력 부족을 지적 받아 뜨끔했다.

# 10년쯤 전이다. 일본 여자탁구대표팀의 감독은 선수들에게 내기를 하나 걸었다. 당시만 해도 일본 여자탁구는 한국에 밀렸다. 특히 김경아 박미영에게 번번이 졌다. 이에 ‘박미영 김경아를 단식이든 복식이든 이기기만 하면 내가 개인적으로 10만 엔을 주겠다’고 한 것이다. 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이후 일본 여자탁구는 이제 한국은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눈부시게 성장했다. 이 감독은 한때 중국귀화선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지만, 시행착오 끝에 일본 선수를 초등학생 때부터 육성하는 것(일관 시스템)이 답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성공했다. 이 감독은 탁구에 대한 열정에 대단하고, 선수 육성 및 이벤트에 대한 아이디어가 기발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표팀에 개인전담코치제를 도입했고, 심지어 외국인이지만 지도자로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는 오광헌(현 보람할렐루야탁구단 감독)을 대표팀 코치와 주니어대표팀 감독으로 깜짝 발탁했다. 물론 이것도 성공했다. 뭐든 한 발 앞서 노력했다고 할 수 있다.

# 탁구기술에 대한 얘기도 주목할 만하다. 이 감독은 긴 랠리에 들어가면 실수가 적은 중국에 이기기 어려우니 선수들에게 지더라도 과감히 공격하라고 주문했다. 길어도 10구 이내에는 승부를 걸라는 것이다. 이에 히라노 미유, 이토 미마 등 젊은 일본여자선수들은 하나씩 결정타를 갖게 됐고, 최근 들어 심심치 않게 중국선수들을 꺾고 있다. 여기에는 스피드와 회전을 바탕으로 한 파워증진이 바탕이 됐다. 또 세부 기술에 대한 열의도 강하다. 특별히 서브를 잘 넣는 선수가 있으면, 대표팀으로 불러 선수들이 배우도록 했다. 리시브도 마찬가지다. 이때는 감독인 자신도 경청한다. 원래 하던 대로, 또 자신의 것만이 옳다고 고집 부리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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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일본 여자탁구를 중흥시킨 무라카미 감독. 그는 냉장고에 늘 김치를 보관할 정도로 김치 마니아이기도 하다.


# 유명하지는 않지만, 이 괜찮은 탁구지도자는 무라카미 야스카즈 일본생명 총감독(59)이다. 그는 20년간 여자대표팀의 코치(12년)-감독(8년)을 맡으며 일본 여자탁구를 일으켜 세웠다.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호성적을 낸 후 대표팀에서 물러났고, 일본생명에서도 총감독으로 물러나 지금은 주니어아케데미를 운영하며 어린 선수들을 키우고 있다. 이런 무라카미 감독이 오는 17일 한국을 방문해 한국 주니어들에게 특강을 한다. 한국중고등학교 탁구 선수들이 모두 참가하는 ‘제56회 보령시 보람상조배 전국남녀중고종별탁구대회(17~21일)’ 현장을 찾아 일본탁구의 강점, 시스템, 그리고 한국탁구에 대한 조언을 전할 예정이다. 한국중고탁구연맹은 그동안 주요 대회 때마다 현정화, 유남규, 박지현, 유승민, 종진용(중국출신 대표팀 코치) 등의 특강을 실시했는데 이번에는 일본탁구의 대표적인 지도자를 초청한 것이다.

# 한국중고탁구연맹의 손범규 회장은 “일본탁구를 이기기 위해 일본탁구를 배우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한국 여자탁구는 명실상부 세계 2위인 일본에 한참 뒤져 있다(남자도 낫다고 할 수 없다). 얼마전 월드컵 단체전에는 출전하지도 못했을 정도다. 그리고 국내랭킹 1, 2위는 모두 중국귀화선수다. 지금의 극심한 침체는 예전의 일본과 닮아 있다. 문제해결에는 무라카미 감독과 같은 창의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창의력은 그냥 생기지 않는다. 열정이 있어야 하고, 그 열정을 바탕으로 부단한 노력(수행)이 이어져야 한다. 그러면 문뜩 깨달음(성과)가 나오는 것이다. ‘인문학으로 광고하다’는 창의력을 설명하면서 ‘시이불견 청이불문(視而不見 聽而不聞)’을 언급했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인문학적 독서'까지는 몰라도, 스포츠에서는 잘 보고 잘 들으면 창의력이 키워질 수 있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유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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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자대표팀 시절의 무라카미 감독(왼쪽)과 오광헌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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