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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타타라타] 남현희의 작은발 이야기
뉴스| 2017-04-26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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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현희는 지난 1월 알제리 국제펜싱연맹(FIE) 월드컵 여자 개인전에서 은메달을 땄다. 당시 4강 진출자들의 모습인데 당연히 남현희가 가장 작았다. [사진=국제펜싱연맹]


# 2010년 발표된 미국 알바니주립대학교의 제레미 앳키슨 진화심리학교수팀의 연구는 흥미롭다. 연구팀은 60명의 여대생들의 발 크기를 측정한 후, 가장 큰 학생 8명과 작은 학생 8명을 뽑았다. 이어 각 그룹 학생들의 얼굴을 조합해 한 사람의 얼굴로 만들었다. 그리고 발이 작은 그룹의 얼굴(A)과 발이 큰 그룹의 얼굴(B)를 77명의 남학생에게 보여준 뒤 ‘어느 쪽이 더 매력적이냐?’고 물었다. 결과는 A를 택한 남학생이 10배나 많았다. 이런 종류의 얘기는 함부로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발이 작으면 다 미인이고, 발이 크면 여성적이지 못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발이 작은 한 운동선수의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덕담 정도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 국내 제화(製靴)업계는 한국사람의 발 크기를 남자는 260㎜, 여자는 235㎜ 정도에 기준을 두고 신발을 만든다. 성인 여자의 경우, 대량생산되는 제품 중 가장 작은 사이즈는 보통 220㎜이다. 미녀검객, 땅콩검객, 주부검객으로 진화해온 남현희(36 성남시청)는 자신이 발이 210㎜이라고 추정해왔다. ‘추정’이라고 한 것은 신장이나 몸무게와는 달리 발사이즈를 정밀측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몸으로 먹고 사는 전문선수들은 일반인들과 크게 다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어쨌든 키(발표용은 155cm, 실제로는 조금 더 작다)가 작은 남현희는 발도 유난히 작아 14세에 펜싱을 시작한 이래 신발 때문에 고충이 많았다. 아니, 지금도 그렇다. 메달리스트로 나름 잘 알려진 선수인 까닭에 아디다스로부터 펜싱화를 후원받는데 가장 작은 것이 220㎜다. 지금도 신발끈을 조여매고, 양말을 2개씩 신으며 뛰고 있다. 오죽하면 미안함이 들었던 아디다스가 신발은 다른 회사 제품을 마음대로 써도 좋다고 했지만 남현희를 위해 작은 운동화를 출시할 회사는 없었다.

# 남현희는 지난 21일 후배 오하나(32)와 함께 피츠인솔이라는 전문업체를 다녀온 뒤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렇지 않아도 주부선수가 된 이후 이상하리만큼 몸이 더 좋아져 마지막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데, 평생을 괴롭혀온 ‘작은 발 고민’마저 해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았기 때문이다. 피츠인솔은 정적인 상태는 물론, 동적인 상태에서의 발 압력을 측정하고 3D프린터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맞춤형 인솔(깔창)을 공급하는 회사다. “제 발이 정확히 213mm였네요. 제 발에 꼭 맞는 인솔을 쓴다면 신발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훈련 및 경기를 할 때 신발 때문에 경기력을 100% 발휘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많았는데 기대가 됩니다.” 피츠인솔의 제품은 한국에서 데이터를 보내면 유럽(벨기에)에서 제작돼 공수되는 까닭에 착용까지는 몇 주 시간이 걸린다. 남현희는 ‘남현희 인솔’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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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현희(왼쪽 사진 오른쪽)가 21일 피츠인솔을 방문한 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진들.


# 그에게 발이 중요한 것은 남현희가 세계펜싱사를 새로 쓴 한국 발펜싱의 상징과도 같기 때문이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김영호(47 로러스펜싱클럽 감독)의 첫 금메달 획득을 시작으로, 지난해 박상영(22 한체대)의 리우쾌거까지, 빠른 발을 앞세운 한국 특유의 스피드펜싱은 유럽 몇몇 나라가 주도해온 세계펜싱계를 뒤흔들었다. 가장 키가 작고, 빠르다 보니 한국형 스피드펜싱 하면 남현희가 떠오른다. 성적도 빼어나다. 1999년 태극마크를 단 이후 2002년부터 2014년까지 4번의 아시안게임 단체전에서 우승했다. 2010년 광저우는 개인전까지 제패하며 2관왕에 올랐으니 금만 5개다. 올림픽에서도 2008년(베이징) 은메달, 2012년(런던) 동메달을 연속으로 따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남현희의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 당초 지난 해 리우 올림픽이 끝난 후 남현희 본인은 물론이고, 펜싱계에서도 은퇴를 당연시했다. 그런데 신기할 정도로 몸이 더욱 좋아졌다. “몸상태가 전성기를 능가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제가 먼저 스포츠과학연구소에 체력측정을 요구했어요. 결과도 놀라웠어요. 제자리멀리뛰기의 경우, 출산 전 운동을 한창 할 때 208cm를, 출산 후에는 202cm를 기록했는데 지금은 214cm가 나왔지요.” 남현희는 지난 1월 알제리 국제펜싱연맹(FIE) 플뢰렌 월드컵 여자 개인전에서 은메달을 땄다. 이렇게 36세에 제2의 전성기를 꿈꾸고 있는 남현희이기에 평생의 고민인 작은 발 문제도 보완이 가능해졌으니 기분이 좋은 것이다.

# 끝으로 이날 남현희와 함께 피츠인솔을 찾은 오하나는 만족감이 더 크다. 그는 왼 다리의 길이가 오른쪽보다 좀 짧다. 펜싱은 균형유지가 중요한데, 이런 문제가 있으니 신발바닥에 이것저것을 넣어 경기에 나서지만 쉽게 손상되면서 여러 문제가 많았다. 피츠인솔의 슈마스터인 이세윤 실장은 “피츠인솔의 최신 의료용 측정장비를 통해 두 선수의 발을 정밀 측정했어요. 남현희 선수의 경우, 큰 신발을 신어와서 그런지 발 앞쪽에 문제가 많았어요. 이를 보완하는 맞춤형 인솔로 나올 겁니다. 오하나 선수의 경우 1cm 정도 높이 차이가 나왔는데 급해서 일단 미드솔 개념으로 6mm를 왼쪽 신발에 넣어놨어요. 완성된 피츠인솔을 착용하면 더욱 좋아질 겁니다”라고 설명했다. 안타까운 것은 남현희나 오하나가 조금 더 일찍 이런 스포츠과학의 세계를 받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모를 뿐, 발 때문에 고생하는 선수나 일반인이 많을지도 모른다. 남현희의 작은 발로 인해, 이런 세태가 조금은 개선됐으면 한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유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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