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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승의 골프 타임리프] 제1호 프로골퍼 월터 하겐 (하) - 멋쟁이 풍운아
뉴스| 2017-11-15 04:57

1913년 US오픈을 계기로 영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미국의 골프는 월터 하겐(1892-1969)의 등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골프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인기 종목으로 자리잡았다.

미국선수들의 기량은 영국을 추월하여 1922년 디오픈에서 하겐이 미국 태생의 선수 최초로 우승을 했다. 자연히 골프 최강국의 지위도 미국으로 넘어갔다. 하겐의 수입은 당시 최고의 스포츠 스타였던 야구의 베이브 루스나 복싱의 헤비급 챔피언인 잭 뎀퍼시를 능가했다. 프로 스포츠 최초로 총 수입 100만 달러를 넘긴 선수가 야구나 복싱이 아닌 골프에서 나왔으니 하겐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하겐은 미국 골프계를 완전히 장악한 킹이었다. 1914년 US오픈의 우승 상금은 300달러에 불과했지만 시범 경기와 광고 수입으로 벌어들이는 금액은 해가 갈수록 커졌다. 그 많은 수입을 아끼지 않고 마음껏 쓰면서 평생을 풍족하게 살았던 하겐이 남긴 말에서 그의 인생관을 알 수 있다.

“나는 백만장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백만장자처럼 살고 싶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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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했던 시절(왼쪽)과 부자가 된 후 월터 하겐의 경기 옷차림.


1914년, 1919년 US오픈 우승

골프장의 헤드프로로 살아가는 것이 2류 인생이라고 생각한 하겐은 프로 야구선수가 되는 것을 꿈꿨다. 1913년 12월 프로 야구 구단인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투수로 지원한 하겐이 테스트를 받기 위해 전지훈련 캠프인 플로리다를 방문했다. 양쪽 팔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하겐의 피칭은 위력이 있었으나 제구력이 나빴다. 필리스는 차라리 배팅능력이 더 좋으니 다음 해에 외야수나 일루수로 다시 지원할 것을 요청했다. 하겐은 골프를 열심히 했듯이 야구를 한다면 메이저리그 선수가 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의 마음에서 골프는 서서히 멀어져 갔다.

1914년 US오픈을 앞두고 하겐은 출전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로체스터 골프클럽의 유력멤버가 제안했다.

“월터, 자네는 우리 클럽의 명예를 빛낼 수 있는 선수인데 US오픈에 불참한다는 것이 말이 되나? 작년에 4위를 했으니 금년에는 우승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시카고에 원정 가는 비용을 모두 내가 부담할 테니 출전하여 우승컵을 가져오게.”

멤버가 비용을 대주겠다는데 안 갈 이유가 없었다. 하겐은 급히 연습을 했는데, 이것 못지 않게 중요한 준비는 바로 화려한 복장을 갖추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클럽멤버들의 멋진 복장을 부러워했던 하겐은 구두도 새로 사고 능력이 되는 한 최고의 멋을 부렸다.

대회가 시작됐고, 하겐의 샷은 좋지 않았지만 고비마다 쇼트게임과 퍼팅으로 파를 세이브했다. 거의 모든 홀을 원퍼트로 마무리 한 하겐이 그의 퍼팅 비법을 공개했다.

“내 퍼팅의 비법은 왼손의 마지막 두 손가락을 단단히 잡는 것이다.”

하겐의 프로 첫 우승은 바로 이 US오픈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나이 스물 한 살이었다.

1918년 디트로이트의 오크랜드 힐스 컨트리 클럽으로 자리를 옮긴 하겐은 1919년 US오픈에서 우승한 후 골프클럽의 헤드프로 자리를 사직하고, 대회에만 출전하는 진짜 프로골퍼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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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디오픈 우승컵을 들고 있는 월터 하겐.


1922, 1924, 1928, 1929년 디오픈 우승

하겐은 디오픈에서 4회 우승을 달성했다. 영국에 가려면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야 했고, 편도 항해만도 일주일이 걸렸던 당시의 여행 환경을 감안하면 그의 4승은 오늘날의 4승보다 훨씬 큰 업적이었다.

1920년 디오픈에 첫 출전을 하게 된 하겐에게 영국 선수들이 바닷바람과 항아리 벙커를 조심하라고 충고해 주었다. 하겐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바람이 아무리 강해도 나의 샷은 바람을 뚫고 나갈 것이다. 항아리 벙커도 넘기면 되니까 문제 없다. 하늘에는 벙커가 없다.”

그러나 하겐의 첫 출전 성적은 예선 통과자 54명 중 53등으로 치욕스러운 결과였다. 미국으로 돌아오면서 하겐은 크게 반성했다. 바람과 싸우지 말고 바람을 피하고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22년 하겐은 디오픈 세 번째 출전 만에 첫 우승을 했다. 바람을 피하는 낮은 샷들을 준비해 간 덕분이었다. 미국 태생 골퍼로서는 처음이었고 외국인으로서는 두 번째 디오픈 우승자였다. 시상식에서 우승상금으로 받은 수표를 캐디에게 주는 통 큰 아량을 베푼 하겐의 모습은 미국의 골프 풍운아였다. 당시 우승상금은 자신의 여행경비보다 훨씬 적은 금액이었다.

영국의 골프팬들은 하겐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하겐의 디오픈 우승으로 미국 골프가 영국에 역전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고, 그 이후 영국은 다시는 골프 최강국의 위치로 돌아오지 못했다.

1924년 하겐이 두 번째 우승을 한 후 1933년까지 10년 연속 미국 선수들이 우승을 휩쓸며 영국의 자존심을 상처받게 했고, US오픈 초창기에 영국으로부터 받았던 수모를 깨끗이 갚아주었다. 그 이후 미국 선수들은 디오픈 우승에 흥미를 잃고 출전을 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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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하겐의 멋진 피니시 동작.


PGA 챔피언십 5회 우승(1921년, 1924-1927년)

PGA 챔피언십은 대회 초기에 매치플레이 방식이었다. 하겐은 타고난 쇼맨이었고, 매치플레이에 유독 강했다. 상대와의 심리전을 잘 이용했고, 관중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전략에 능했다. 쉬운 샷은 어려워 보이도록 시간을 끌며 고심하다가 관중이 모이면 멋지게 처리했고, 어려운 샷은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쳐 버렸다. 1925년 보비 존스와 맞붙었던 72홀 매치 플레이에서 12홀 차이로 대승을 거둔 것도 하겐이 얼마나 강한 매치플레이어인지를 증명한다.

하겐은 1924년부터 1927년까지 4년 연속 PGA챔피언십에서 우승하는 대기록을 남겼다. 메이저 대회 4회 연속우승은 19세기 말 톰 모리스 주니어가 디오픈에서 기록했고, 20세기 이후에는 전무후무한 업적이었다.

풍운아의 생활방식

하겐은 최고의 수입을 올리면서도 큰돈을 모으지 않았다. 여행 중에도 통큰 소비를 하다가 돈이 떨어지는 경우가 생겼다. 돈이 떨어지면 근처의 큰 도시로 가서 최고급 호텔에 투숙했다. 호텔 매니저를 불러 가까운 고급 골프장에서 시범경기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하면 되는 것이었다. 최고의 골프스타 월터 하겐의 시범경기를 거절하는 골프장은 없었다. 시범 경기 후 받는 수고비는 쓰고 남을 만한 큰 금액이었다.

한 번은 1,000달러의 거금이 걸린 시범경기의 마지막 홀에서 4m짜리 윈닝 퍼트를 남기고 있었다. 망설이지 않고 퍼팅을 한 하겐은 공이 굴러가는 것을 보지도 않고 심판에게 뒤 돌아서서 상금을 달라고 손을 벌렸다. 공은 당연히 홀컵 가운데로 사라졌다. 그의 프로골퍼 경력 30년 동안 마지막 홀에서 쓰리 퍼트를 한 적이 없었다.
하겐은 골프를 사랑하지 않았고 단지 직업으로 골프를 쳤을 뿐이라고 고백한 바 있으며 연습을 열심히 할 만큼 부지런하지도 않았다.

대회에 참가할 때에는 큰 트렁크 몇 개 분량의 옷과 구두들을 가지고 다녔다. 가난한 선수에게는 입었던 옷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의 사진들을 살펴보면 얼마나 멋쟁이였는지 실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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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4번째 디오픈 우승 후 영국의 헨리 코튼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월터 하겐(가운데 왼쪽).


은퇴 이후

1942년 PGA챔피언십을 끝으로 하겐은 더 이상 메이저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가 달성한 메이저 11승은 역사상 니클라우스 18승 타이거 우즈 14승 다음으로 많은 우승이었다. 후배 진 사라센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모든 프로골퍼들은 상금을 받으며 하겐에게 감사해야 한다. 하겐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프로골퍼도 없었다.”

1963년 하겐의 손자가 권총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큰 쇼크를 받은 하겐도 1969년 세상을 떠나 손자 옆에 묻혔다. 1982년 하겐의 아들도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월터 하겐은 자손을 남기지 못했다. 그가 자서전에 썼던 말이 남아있을 뿐이다.

“짧게 살고 떠나갈 인생인데 너무 서두르지도 말고 너무 걱정하지도 말라. 살아가는 동안 마주치게 될 꽃 향기들도 놓치지 말자.”

하겐이 세상을 떠난 후 추도식이 한 클럽하우스에서 거행되었다. 연설에 나선 아놀드 파머가 이렇게 말했다. “월터 하겐이 없었다면 우리 프로 골퍼들은 아직도 클럽하우스에 들어오지 못하고 프로샵의 구석 방에서 추도식을 진행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겐이 프로골퍼들에게 클럽하우스를 개방시킨 공로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말이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프로 골퍼들은 하겐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풍운아 하겐이 없었다면 현재의 부유한 프로골퍼들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 박노승 씨는 골프대디였고 미국 PGA 클래스A의 어프렌티스 과정을 거쳤다. 2015년 R&A가 주관한 룰 테스트 레벨 3에 합격한 국제 심판으로서 현재 대한골프협회(KGA)의 경기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건국대 대학원의 골프산업학과에서 골프역사와 룰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위대한 골퍼들의 스토리를 정리한 저서 “더멀리 더 가까이” (2013), “더 골퍼” (2016)를 발간한 골프역사가이기도 하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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