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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승의 골프 타임리프] ‘작은 거인’ 진 사라센 - 최초의 그랜드 슬래머
뉴스| 2018-01-17 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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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진 사라센.


- 골프 역사 최초로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달성.
- 20세에 메이저 챔피언십 2개를 우승한 최연소 더블 메이저 챔피언.
- 키 165cm의 단신 핸디캡을 극복하고 메이저 7승을 달성한 작은 거인.
- 골퍼가 된 이태리 목수의 아들

'미국 최초의 골프 영웅' 월터 하겐이 1892년에 태어났는데, 그 10년 후인 1902년 나중에 하겐의 강력한 라이벌이 되는 진 사라센(1902-1999)과 보비 존스가 태어났다. 사라센의 아버지는 이태리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가난한 목수였는데, 당연히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목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8세에 캐디가 되어 돈을 벌기 시작했던 사라센은 학교 공부를 거의 못했다. 1913년 US 오픈에서 캐디 출신 프란시스 위멧이 우승하자 각 골프장의 캐디들도 골프를 치게 되었지만 사라센은 프로 골퍼의 캐디가 되고 싶었다.

1917년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면서 경기가 나빠지자 사라센은 아버지를 따라 목수 일을 시작했다. 무거운 망치로 못을 박는 일을 했는데 이 때에 강한 손목이 만들어져서 골프에 유리하게 되었다.

사라센은 16세가 되었을 때 목수보다 수입이 더 좋은 무기공장에 취직해 추운 겨울을 보내다가 급성 폐렴에 걸렸다. 몇 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목숨을 건진 사라센이 퇴원 할 때 의사가 말했다. “폐가 나빠졌으니 이제 먼지가 많은 곳을 피하고, 신선한 공기와 햇빛을 받을 수 있는 곳에서 일하라.” 이 말을 들은 사라센의 머리에는 골프장이 떠올랐다. 이제 아버지가 목수 일을 나가자고 할 때 의사의 지시를 핑계로 골프장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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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디 오픈과 US 오픈의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는 진 사라센.


정신력 훈련

사라센은 이제 캐디 대신 프로 골퍼가 되기로 결심하고 9홀짜리 골프장에 취직해 본격적인 연습을 시작했다. 165cm에 50kg의 작은 체격이었지만 사라센의 장타력은 주위 프로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던 중 1919년 골프를 칠 수 없는 겨울에 자기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임시로 일을 시작했다. 사라센의 임무는 입원실에서 사망한 환자의 사체를 지하실 시체 보관실로 옮기는 것이었다. 입원실에서 시체를 바퀴가 달린 침대에 실어주는 것은 간호사가 도와 주었는데 지하실의 시체 보관장소에 갈 때는 혼자 가야 했다. 시체실은 무서웠고 혼자서 시체를 내려놓는 것도 힘에 부쳤다. 사라센은 이 때에 강한 집중력과 인내심을 만들 수 있는 정신적 훈련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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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격을 비교해보자. 왼쪽부터 진 사라센, 토미 아머, 월터 하겐.


스무 살의 신데렐라

사라센의 골프샷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그의 플레이를 본 골프장 멤버들은 그를 1920년 인버니스 골프클럽에서 열리는 US 오픈에 참가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예선을 3등으로 통과하고 본선에서 30등을 한 사라센은 실망했지만, 자신의 골프영웅 월터 하겐을 만나 본 것으로 만족하며 돌아왔다.

락커 룸에서 만났던 하겐은 다른 선수들은 부를 때는 보이(boy)라고 불렀는데, 사라센을 부를 때는 키드(kid)라고 했다. 이제 겨우 18세이고 체격이 너무 왜소해서 벌어진 상황이었지만, 사라센은 자존심이 상했고 언젠가 하겐을 꺾겠다고 결심했다.

사라센이 깜짝 스타로 떠오른 것은 스무 살 때인 1922년이었다. US 오픈의 대회장인 스코키 골프클럽에서 연습라운드를 해 본 사라센은 자기에게 돈을 걸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티샷이 페어웨이를 벗어나지 않으면 70%는 성공하는 코스였는데 사라센의 티샷은 장타에 정확성을 갖추고 있었다. 시합 결과 동갑내기 라이벌 보비 존스를 1타 차이로 누른 사라센이 첫 번째 메이저 우승 트로피를 챙겼다.

1922, 1923년 PGA 챔피언십 연속 제패

5주 후에 열린 PGA 챔피언십은 매치 플레이였는데, 참가 선수들 사이에 사라센 견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어리고 땅콩만한 체격으로 나타난 신인선수에게 PGA 챔피언십 트로피까지 넘겨 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자신감을 얻었고 적당히 거만해진 사라센은 다른 선수들의 태도를 무시하고 상대를 제압해 나갔다. 4강 전에서 키가 사라센 만한 크룩생크를 만났을 때가 고비였지만 잘 넘기고 PGA 우승 트로피까지 들어올렸다. 20세 이전에 메이저 대회를 2개 이상 우승한 선수들은 톰 모리스 주니어, 존 맥더머트 그리고 사라센뿐이다.

1923년 US 오픈에서 우승자 보비 존스에게 14타 차이로 패배하면서 자존심이 상했던 사라센은 PGA 챔피언십에서 명예회복을 다짐했다. 펠햄 컨트리 클럽에서 열린 PGA 챔피언십에는 64명의 프로가 참가했는데 드디어 사라센과 월터 하겐이 결승전 36홀 매치에서 만났다. 매치플레이의 달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하겐을 넘어야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라센은 36홀이 끝날 때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하는 팽팽한 접전을 벌였다. 결국 연장 두 번째 홀에서 하겐을 제압한 스물 한 살의 사라센이 메이저 3승째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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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하겐(오른쪽)과 진 사라센.


긴 슬럼프의 원인은 그립

그러나 승승장구할 것 같았던 사라센의 위세는 거기서 일단 끝이 났다. 1932년 디 오픈의 우승을 할 때까지 9년 동안 긴 슬럼프를 겪은 것이다. 사라센은 슬럼프가 찾아 온 이유를 알기 위해 스윙의 모든 요소들을 점검했으나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긴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답을 찾아냈는데 그것은 그립의 문제였다. 자기도 모르게 그립이 바뀌었던 것이다. 문제는 백 스윙의 톱에서 오른손이 그립을 단단히 잡지 않고 느슨해지는 것이었다. 스윙의 시작부터 임팩트를 끝낼 때까지 오른손의 가운데 두 손가락은 물론이고 엄지와 집게 손가락도 견고하게 잡고 있어야 했다. 그립의 문제점을 교정하면서 사라센의 성적도 크게 좋아졌다. 훗날 사라센은 그립이 골프 스윙의 75%를 차지 한다고 말했다.

새로운 무기 샌드웨지

1931년 사라센은 오늘날의 샌드웨지를 고안해냈다. 평소에 벙커 플레이가 약했으므로 벙커에서 치기 쉬운 클럽을 만들기 위해 클럽 바닥을 기계로 깎아가면서 수천 개의 공을 쳐 보았다. 완성품이 나왔는데 웨지의 바닥 부분을 둥그렇게 튀어나오도록 만들어서 벙커 샷을 할 때 클럽이 미끄러져 나가도록 만들었다.

사라센은 샌드웨지를 만든 후 벙커의 달인이 되었고, 1932년 디 오픈에 그 클럽을 가지고 가서 우승하게 되었다. 디 오픈에서는 R&A가 사용을 금지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샌드웨지를 코트 속에 숨겨서 가지고 다녔다. 스스로 샌드웨지의 발명을 골프에 대한 큰 공헌이라고 믿었다. 디 오픈 우승 후 사라센의 스폰서인 윌슨이 샌드웨지를 생산하여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첫 해에 5만 개가 넘게 팔려나갔다.

사라센은 1932년 디 오픈에서 우승한 후 그 해 US 오픈에서도 우승했고, 1933년에는 PGA 챔피언십까지 우승하면서 완벽하게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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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스 우승자켓을 입은 사라센(가운데).


커리어 그랜드 슬램의 완성

1934년 제1회 마스터스 대회에 불참했던 사라센은 1935년 제2회 대회부터 참가하기 시작했다. 평생 라이벌이었던 보비 존스가 만든 대회였으므로 꼭 한번 우승하고 싶었다. 이 대회의 마지막 라운드 15번 홀에 도착했을 때 선두로 끝마친 크렉 우드에게 4홀을 남기고 3타 차로 뒤지고 있었다. 클럽하우스에서는 기자들이 우드의 사진을 찍고 우승기사를 쓰고 있었다.

사라센이 캐디에게 물었다.

“우리가 우승하려면 몇 타를 쳐야 하나요?”

“미스터 사라센, 우리는 3-3-3-3이 필요 합니다.”

이글-파-버디-버디를 하라는 말인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파5 15번 홀에서 사라센의 티 샷이 페어웨이 가운데를 갈랐다. 홀까지 235야드가 남았는데 그린 앞 연못을 넘겨야 했다. 우승을 위해서는 무조건 그린을 노려야 했는데 사라센의 4번 우드 샷이 연못을 넘어 그린에 떨어지더니 굴러서 홀인이 되고 말았다. 더블이글로 순식간에 선두와 동타가 되는 순간이었다.

스코어보드 본부에 사라센 ‘15번 홀 2’ 라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본부에서는 “16번 홀 파3에서 2가 아닌가?”라고 되물어 왔고 보고를 맡은 소년은 ‘15번 홀 2’ 라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보내고 있었다. 이 샷은 골프역사 상 가장 위대한 샷 중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사라센은 나머지 세 홀을 파로 마무리 한 후 다음날 36홀 연장전에서 우드를 물리치고 마스터스 챔피언이 되었다.

사라센이 마스터스에서 우승을 했을 때에는 현재의 그랜드 슬램 개념이 없었지만, 그랜드 슬램 대회를 4개로 정한 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그가 최초의 그랜드 슬래머였다.

97세까지 마스터스 대회의 시구를 하며 천수를 누렸던 작은 거인 진 사라센은 1999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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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마스터스에서 시구에 나선 95세의 사라센.



* 박노승 씨는 골프대디였고 미국 PGA 클래스A의 어프렌티스 과정을 거쳤다. 2015년 R&A가 주관한 룰 테스트 레벨 3에 합격한 국제 심판으로서 현재 대한골프협회(KGA)의 경기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건국대 대학원의 골프산업학과에서 골프역사와 룰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위대한 골퍼들의 스토리를 정리한 저서 “더멀리 더 가까이” (2013), “더 골퍼” (2016)를 발간한 골프역사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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