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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승의 골프 타임리프] 디 오픈의 '또 다른 영웅' 명캐디 앨피 파일스
스포츠|2018-07-10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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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톰 왓슨(왼쪽)과 캐디 앨피 파일스.

톰 왓슨의 캐디는 언제나 브루스 에드워드였다. 1973년에 만난 두 사람은 브루스가 세상을 떠난 2004년까지 선수와 캐디이며 형제이며 절친이었다. 그러나 브루스는 왓슨의 메이저 8승 중에서 1982년 US 오픈 우승 때 단 한 번 캐디를 했다. 1977년, 1981년에 마스터스 우승을 할 때는 의무적으로 마스터스가 지정하는 하우스 캐디와 플레이해야 했고, 디 오픈에서 다섯 번 우승을 할 때 마다 그의 옆에는 앨피 파일스가 있었다.

앨피 파일스가 살아있었다면

2009년 턴베리에서 열렸던 디 오픈에서 59세의 톰 왓슨은 4라운드의 마지막 홀을 남기고 1타차 선두에 나서며 세계의 골프팬들을 열광시켰다. 18번 홀의 티샷을 페어웨이로 완벽하게 친 왓슨은 이제 파만 하면 현재 48세의 최고령 메이저 우승기록을 가지고 있는 줄리우스 보로스를 누르고 59세의 최고령 메이저 챔피언이 될 수 있는 순간이었다.
홀까지 187야드의 어프로치 샷을 남긴 왓슨은 캐디 닐 옥스만과 의논한 끝에 8번 아이언을 선택했다. 샷을 하는 순간 완벽하다는 느낌이 왔지만 그린 앞에 떨어진 볼은 크게 바운스 되더니 그린을 넘어 러프로 들어갔다. 보기를 범한 왓슨은 스튜어트 싱크와 연장전에 갔지만 그의 마력은 이미 힘을 잃고 패하고 말았다.

8번 아이언은 잘 못된 선택이었고 9번 아이언을 쳐야 했다. 톰 왓슨이 디 오픈에서 다섯 번이나 우승할 때 언제나 백을 메었던 명 캐디 앨피 파일스가 살아있었다면 틀림없이 9번 아이언을 쳤을 것이라는 미디어의 분석은 앨피가 얼마나 유능한 캐디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톰 왓슨의 디 오픈 첫 우승

앨피의 아버지는 로얄 버크데일의 캐디였고, 앨피의 형제들도 모두 캐디를 천직으로 알고 살았으며 캐디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1968년 게리 플레이어의 디 오픈 우승 때 캐디를 했던 앨피는 캐디 비용 문제로 게리 플레이어와 다투고 헤어졌다.

1975년 디 오픈은 카누스티 골프 링크스에서 열렸는데 25세의 톰 왓슨이 처음으로 디 오픈에 출전하기 위해서 영국에 왔다. 자기의 캐디인 부루스 에드워드를 데려오기에는 비용이 부담돼 영국 캐디를 수소문하여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앨피 파일스였다. 앨피는 왓슨의 샷을 보며 직감적으로 우승 가능성이 있는 젊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링크스 코스를 처음 경험하는 왓슨이 앨피와 함께 연습라운드에 나갔다. 링크스 코스에서 첫 티샷을 한 왓슨은 캐디가 원하는 방향으로 완벽한 샷을 했다고 생각했다. 볼의 방향을 따라 페어웨이로 갔지만 자기의 볼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앨피는 말 없이 페어웨이 왼쪽 끝에있는 항아리 벙커로 가더니 왓슨의 볼이 있다는 사인을 보내왔다. 자기가 쳤던 방향보다 40야드나 왼쪽으로 벗어난 지점에 볼이 있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링크스 코스의 골프는 골프가 아니고 행운이냐 불행이냐 이구나.” 왓슨은 링크스 코스에서 바람과 바운스 방향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왓슨보다 스물두 살이나 많은 앨피는 왓슨을 부를 때 “미스터 왓슨”이라고 깎듯이 존칭을 써서 불러주었지만, 클럽을 선택할 때는 단호하게 자기의 주장을 밀어 부쳤다. 결국 왓슨은 호주의 잭 뉴턴과 18홀의 연장전을 벌인 끝에 첫 우승을 했다.

2차 대전 이후 디 오픈의 첫 출전에서 우승했던 선수는 4명 있었는데 1953년 벤 호건, 1964년 토니 레마, 1975년 톰 왓슨, 2003년 벤 커티스였다. 4명 중에서 벤 호건과 톰 왓슨이 우승했던 골프장이 금년(2018년)의 디 오픈 개최지인 카누스티 골프 링크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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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디 앨피 파일스(왼쪽)가 왓슨의 퍼트 성공을 지켜보는 장면. 파일스는 캐디 명예의 전당에 첫 해에 헌액됐다.


"이건 너무 적은 금액입니다"


시상식이 끝난 후 캐디 비용을 받으러 간 앨피는 왓슨이 준 수표의 금액을 보고 크게 화를 냈다. “이 정도의 돈은 당신이 더 필요할 것입니다”라고 외치며 땅에 던져버렸다. 당시에는 스물다섯 살의 왓슨이 부자가 아니고, 디 오픈의 우승상금이 1만 2,000달러에 불과해 여행경비를 빼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었기에 왓슨의 계산은 이해할 만했다. 그래서 당사자는 서운했던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다시는 안 만날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로 헤어졌다.

1976년 로얄 버크데일에서 열린 디 오픈에 참가한 디펜딩 챔피언 왓슨은 자기의 캐디 브루스 에드워드를 데리고 왔다. 앨피는 자기의 홈코스에서 열리는 디 오픈에서 타이틀 방어의 기회를 잃었다. 앨피가 없는 왓슨은 36홀 컷을 겨우 통과했지만 54홀 컷을 통과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당시에는 2라운드 후와 3라운드 후에 두 번의 컷을 했다).

다시 앨피를 찾아라

두 사람의 여행경비를 손해 보았고 앨피의 가치를 새삼 알게 된 왓슨은 1977년 턴베리의 디 오픈부터 다시 앨피를 찾아 손을 잡았다. 3, 4라운드에서 잭 니클라우스와 함께 플레이 했던 두 선수는 3라운드에서 똑같이 65타를 쳐서 공동선두가 되었다. 4라운드 17번 홀이 끝났을 때 왓슨이 1타를 앞섰고 18번 홀의 티샷을 완벽하게 쳤다. 이제 180야드의 어프로치 샷을 남겼는데 앨피가 7번 아이언을 가르켰다.

“앨피, 나는 6번 아이언으로 160야드를 치는데 7번으로 180야드를 치라구?”
“미스터 왓슨, 지금 몸에는 아드레날린이 가득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7번이면 충분합니다.”

왓슨은 앨피의 주문대로 7번 아이언을 쳤는데 볼은 홀의 70cm 앞에 멈춰서 버디를 하게 되었다. 마지막 홀에서 니클라우스도 버디를 하여 왓슨 65타, 니클라우스 66타로 왓슨이 두 번째 우승을 했다. 두 선수의 명승부는 '태양의 결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디오픈 최고의 명승부였다.

왓슨은 1980년 뮤어필드, 1982년 로얄 트룬, 1983년 로얄 버크데일에서 앨피와 함께 크라레 저그(디 오픈 우승컵)를 품에 안았다. 1983년 대회의 마지막 홀에서 213야드를 남긴 왓슨에게 2번 아이언을 뽑아 주었던 앨피의 선택은 완벽했다. 33세에 메이저 8승을 올린 왓슨의 앞날은 밝아 보였지만 1983년 디 오픈의 우승은 톰 왓슨의 마지막 메이저 우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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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피 파일스의 이야기를 담은 책 '포어'.


못 이룬 꿈

디 오픈 5승을 모두 다른 골프코스에서 했던 왓슨은 세인트 앤드루스에서의 우승을 염원하고 있었다. 1984년 디오픈이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열렸는데 3라운드까지 선두를 달리며 우승기회를 잡았던 왓슨은 스페인의 영웅 세베 발레스테로스에게 역전패하며 2위로 끝나고 말았다. 샷은 살아있었지만 퍼팅이 나빠지면서 다시는 우승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 이후 가장 확실한 우승기회는 25년 후인 2009년에 찾아온 것인데 그때는 앨피가 세상을 떠난 후였으므로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앨피와 함께 5승을 했던 왓슨의 운명은 결국 앨피에게 달려 있었던 셈이었다.

앨피는 디 오픈에서 6승을 차지하여 최다승 캐디가 되었다. '캐디 명예의 전당'이 설립된 첫 해에 헌액되었고, 지금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캐디 베스트 10에 선정되고 있다.

* 박노승 : 건국대 산업대학원 골프산업학과 겸임교수, 대한골프협회 경기위원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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