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1930년대…문인·화가 ‘지적 공감’은 시들지 않았다
2021-02-08 11:28


봉준호 감독의 외할아버지인 소설가 박태원의 드로잉. 1933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반년간’이라는 소설의 삽화다. [헤럴드 DB]


이중섭, 시인 구상의 가족, 1955, 종이에 연필, 유채, 32×29.5cm, 개인 소장. [현대미술관 제공]


구본웅, 친구의 초상, 1935, 캔버스에 유채, 62×5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현대미술관 제공]


이상이 디자인한 김기림의 시집 ‘기상도’ [헤럴드 DB]

화가 구본웅(1906~1953)이 그린 ‘친구의 초상’은 야수파적 필치가 살아있는 수작으로 꼽힌다. 며칠이나 면도를 하지 않은 창백한 얼굴의 ‘친구’는 파이프 담배를 꽤나 불량하게 물었다. 붉게 타들어가는 담배와 샛빨간 입술, 피가 비칠듯 형형이 살아있는 눈빛은 이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짐작케한다. 연구자들은 이 ‘친구’가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1910~1937)이라고 추정한다.

일제에 의해 근대화가 진행되던 1930년대. 어둡고 엄혹한 그 시기에도 예술은 꽃을 피웠다. 문인과 화가는 ‘다방’에서 만나 서로의 생각을 공유했고, 아름다움과 정의를 논했다. 글을 쓰고, 출판을 하고, 신문에 발표했으며 많은 독자들이 당대의 지식인들을 따랐다. 과거를 더듬어보는 방식은 하나다. 기록을 따라가는 것.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은 좀 더 입체적으로 이 시대를 조명한다. 당시의 그림만이 아닌 화가와 문인들과의 교류까지 살폈다. 기획전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는 당시 경성을 이끌었던 지식인 그룹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일제강점기’로만 알려진 20세기 초반의 한국을 전시장으로 소환한다.

전시장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그래픽은 1930~40년대 한국 문예인들 사이의 네트워크다. 이상, 김기림, 박태원, 구본웅, 길진섭, 김환기는 개인적·집단적 관계망 속에서 얽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았다. 직접 혹은 한 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이기도 하다. 이상이 운영했던 다방 ‘제비’에서 미샤 엘만이 연주한 ‘랄로 협주곡’, ‘엘레지’를 들으며 아폴리네르, 장 콕토 등 초현실주의 문학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뿐만이랴, 가끔은 전시도 하고 시도 발표하는 문화센터로도 변신했다. 박태원의 소설에서 묘사되듯 룸펜 예술가들의 ‘어쩔수 없는’ 소일거리였는데,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지식인 크루의 아지트였다.

그 과정에서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입체파, 러시아 구상주의 등 서양의 사상들이 물밀듯이 들어오고 소화됐다. 전시 첫 섹션인 ‘전위와 융합’에서는 이들 예술가들의 장르를 넘나드는 실험적 시도가 펼쳐진다. 김환기의 ‘론도’, 유영국의 추상은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다.

두 번째 섹션인 ‘지상(紙上) 미술관’에서는 문인과 미술인이 만날 수 밖에 없었던 사회 시스템으로서 신문과 잡지를 살펴본다. 그들은 신문에 소설을 썼고, 삽화를 그렸다.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신문소설과 삽화는 그만큼 영향력이 컸다. 미술관의 작품 하나보다 문인과 미술가가 합작한 지면의 쪽 글과 실험적 그림 하나가 더욱 전위적이었던 셈이다.

지면의 실험은 책에서도 이뤄진다. 김기림의 시집 ‘기상도’(1936)는 이상이 디자인했다. 검은 바탕에 은하수를 상징하는 은색 띠는 지금 보아도 현대적이다.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는 정지용이 서문을 달았다. 밤하늘과 달빛에 비쳐 실루엣을 드러낸 앙상한 나무가 인상적인 목판 표지화는 판화가 이정의 작품이다.

세 번째 섹션에서는 문학인과 미술인으로 이뤄진 ‘파트너’들을 주목한다. 정지용과 장발, 백석과 전형운, 김기림과 이여성, 이태준과 김용준 등 개개인의 네트워크에서 탄생한 작품들이 전시됐다. 이쾌대가 자신의 형을 그린 ‘이여성의 초상’은 김기림의 결혼을 축하하며 신혼집을 찾았던 이여성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김기림은 ‘붉은 울금향과 로이드 안경’이라는 글에서 튤립을 집들이 선물로 들고 찾아온 이여성을 “위대한 콧마루 위에 걸려서 끊임없이 약소민족의 대국을 통찰하는 검은 로이드 안경과 붉은 튤립 향내나던”이라고 묘사한다.

후대 예술가인 김광균, 오장환, 최재덕, 이쾌대, 이중섭, 구상, 김환기, 조병화의 관계도 이번 섹션에서 만날 수 있다. 시인 김광균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서 건설실업주식회사를 이끌고 있었다. 1952년에 찍힌 그의 사무실 사진에는 김환기의 ‘달밤’이 걸려있다. 재정적 여력이 있던 그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사주며 지원했다. 김환기 외에도 최재덕의 ‘포도’, ‘한강의 포플러 나무’도 그가 소장했던 작품들이다.

마지막 섹션에서는 화가였지만 뛰어난 문장력을 지녔던 작가들을 조명한다. 김용준, 장욱진, 한묵, 박고석, 천경자, 김환기의 글과 그림이 함께 나왔다. 전시의 대미는 김환기의 전면점화가 장식한다. “요새 제 그림은 청록홍(靑綠紅). 점 밖에 없어요” 1966년 김광섭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그림들이다.

이외에도 봉준호 감독의 외할아버지인 소설가 박태원의 드로잉도 눈길을 끈다. 1933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반년간’이라는 소설에 삽화도 함께 그렸는데 클로즈업이나 부감과 같은 영화적 기법을 십분 활용했다.

전시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지적 공감대’다. 숨막히는 역사의 질곡에서 이들 문예인들은 서로를 통해 호흡했다. 전시를 기획한 김인혜 학예사는 “이렇게 처참한 시대에 이 많은 천재들이 예술과 문학에 몰두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오히려 예술을 통해 역설의 시대를 견뎌낼 힘을 얻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설명한다. 그림은 읽고, 시는 보는 전시다. 5월 30일까지. 이한빛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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