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천재’ 허인회 “지옥의 시드전, 골프가 나를 깨웠다” [조범자의 필드 Tee-Talk]
2021-05-25 13:27


누구나 살면서 자기만의 드라마를 만들어 가고 있지만, 이 남자 만큼 극적인 인생도 드물 것같다. 아마추어 시절 23승을 휩쓴 국가대표, 프로에서 잠시 맛본 정상의 순간과 방황, 처음 경험한 악몽같은 시드전, 지옥에서 탈출한지 1년여 만에 거둔 생애 첫 메이저 우승. 스스로 “아마추어 때 내 인생의 운을 다 써버린 줄 알았는데, 이런 순간이 오다니. 거짓말같은 일이 벌어졌다”며 다시 찾아온 화양연화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다.

GS칼텍스 매경오픈서 생애 첫 메이저 우승을 달성하며 한국프로골프(KPGA) 상금랭킹 1위에 오른 허인회(34)를 만났다. 전속캐디이자 멘탈코치이자 평생의 반려자인 아내 육은채(33) 씨도 함께 했다.

허인회는 오는 27일 개막하는 KB금융 리브챔피언십서 프로 데뷔 첫 2연승에 도전한다. 타고난 재능에 비해 연습을 하지 않아 ‘게으른 천재’로 불렸던 남편은 이제 눈만 뜨면 연습장으로 달려간다고 고백한다. 옆에서 가만 듣던 아내가 생긋 웃으며 말한다. “우리 남편, 많이 달라졌죠?”


선수와 캐디로서 생애 첫 메이저 우승을 합작한 허인회-육은채 부부가 서울 필동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며 밝게 웃고 있다. 노랗게 탈색한 헤어가 트레이드마크였던 허인회는 “셀프로 부분 탈색을 하려다 파란색 염색약을 잘못 집는 바람에 이런 색이 나와 버렸다”고 웃었다. 조범자 기자

▶지옥의 시드전, 달라진 골프인생=6년 만의 우승 스토리에서 가장 많이 화제에 오른 건 역시 캐디 아내였다. 일본투어(JGTO)에서 활약하던 2014년 시험삼아 캐디백을 메본 게 시작이었다. 골프를 전혀 몰랐던 당시 여자친구인 아내는 보통의 캐디가 하는 클럽 선택이나 코스 공략 등은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오빠, 기분이 좀 다운된 거같아. 텐션을 올려봐’ ‘걸음이 좀 빨라졌네’ 하는 식이 전부였다. 사소해 보이는 한마디의 위력은 놀라웠다.

“그런 말들이 저한테 엄청나게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무작정 부탁했죠. 진짜 미안하지만 캐디 좀 해줘야겠어.” 남편이 말하자 아내가 거든다. “저는 그런 것만 보였어요. 걸어가는 뒷모습만 봐도, 모자를 고쳐쓰거나 공을 만지는 모습만 봐도 남편 기분이 지금 어떤지 알죠.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남편이 아내 설거지하는 뒷모습만 봐도 심기가 불편한지 아닌지 다 보이는 것처럼요.(웃음)”

2019년 결혼한 뒤로 연습량이 확 늘었다. ‘게으르지 않은’ 천재가 됐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해 프로데뷔 후 처음으로 투어 카드를 잃었다. ‘죽음의 시드전’을 턱걸이로 통과하고 올해 다시 정식으로 투어에 나설 수 있게 되면서 골프를 대하는 자세가 확 달라졌다.

“대회 하나하나가 소중해졌어요.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거든요. 이번 우승으로 5년 시드를 받게 됐잖아요. 상금이 좋냐, 시드가 좋냐 물어보면 백이면 백, 시드라고 말할 수 있어요. 대회에 출전할 수 있다는 게 이렇게 감사한 일인지 몰랐어요.”


GS칼텍스 매경오픈서 생애 첫 메이저 우승을 달성하며 한국프로골프(KPGA) 상금랭킹 1위에 오른 허인회 선수가 샷을 하기 전 아내 육은채 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조던 스피스가 물었다 “도대체 넌 어디서 왔니?” =2014년 도신 토너먼트에서 28언더파 우승을 거두며 JGTO 역대 최다 언더파 신기록을 세운 허인회는 바로 다음 대회인 던롭피닉스 토너먼트에서 조던 스피스(미국), 마쓰야마 히데키(일본)과 동반 라운드를 한다. 당시 두 선수 모두 PGA 투어 1승씩을 보유한 떠오르는 샛별. 그런데 스피스는 허인회의 세계랭킹이 자신보다 높은 데다 장타와 숏게임에서 탁월한 경기력을 보이자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넌 도대체 어느 투어에서 뛰는 선수냐. PGA 투어에는 언제 올 예정이야?”

허인회는 당시를 떠올리며 “스피스·마쓰야마와 비슷하게 치다 보니 나도 미국에 가볼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올해 1월 PGA 투어 소니오픈에 출전한 뒤 생각이 좀 달라졌다. 체력과 피지컬 밸런스를 착실하게 만들고 도전해야 하는데 그 부분에서 좀 고민이 되더라. 지금 당장은 미국 진출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국내 투어에 집중할 계획인 그에겐 아직 메인 후원사가 없다. 서브스폰서(휴온스, 이안폴터, 콜란토테, 지포어)와 용품 후원(캘러웨이, 타이틀리스트)만 받고 있다. 모자에 새겨진 ‘BONANZA’는 부친이 태국에서 운영하는 골프장 이름. 작년에 1년 계약하며 따로 계약금도 받았지만 올해는 이름만 달고 있는 상태다. 허인회는 “우승으로 홍보도 많이 됐으니 보너스 좀 달라고 조르는데 꿈쩍도 안하신다”고 웃으며 “메인 스폰서를 빨리 찾고 싶은데 아직 못만나고 있다”고 했다.

▶“은퇴 전 목표? 은퇴 안하는 게 나의 꿈”=짧은 백스윙으로 딱딱 끊어치는 허인회 만의 퍼트 스타일도 골퍼들 사이에서 화제다. 특히 유리알 그린으로 소문난 남서울CC에서 끊어치듯 때리는 중장거리 퍼트가 잇따라 홀컵에 떨어지며 우승에 큰 역할을 했다. 현재 KPGA 퍼트랭킹(그린 적중시 퍼트 수)에서도 1위(평균 1.65개)에 올라 있다.

허인회는 “원리는 간단하다. 백스윙을 많이 들수록 내려오는 동안 흔들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짧게 드는 것이다. 공을 보낼 수 있는 최소한만 든다. 거리감은 백스윙 크기가 아니라 템포로 맞춘다. 하지만 많은 연습으로 터득한 거라 아마추어 골퍼들에겐 권하지 않는다”고 했다.

골퍼로서 은퇴 전 이루고 싶은 목표를 묻자 예상치 못한 답변이 나왔다. 잠실중 1년 때 처음 골프를 시작한 후 그는 골프에서 도망치는 게 일이었던 사람이다. 축구로, 오토바이로, 자동차로. 기회만 있으면 골프를 떠나고 싶어 했던 그가 답한다.

“은퇴하지 않는 게 제 목표입니다. 걸어서 라운드 돌지 못하는 날까지 대회에 나오는 게 꿈이에요. 시드전에 한번 갔다오고 나니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이러다 골프를 안치는 게 아니라 못 칠 수도 있겠구나’ 하는.”

무거운 캐디백을 메야 하는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예전에는 공 치기 싫다며 마흔까지만 하겠다더니?” 남편이 달래듯 말한다. “마흔까지는 시드가 생겼으니, 그럼 50세까지만 하면 안될까?” 골프천재와 천생연분 캐디가 펼칠 필드 드라마를 앞으로 오랫동안 볼 수 있을 것 같다.

조범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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