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AI·반도체...한 해 4만 우수인력이 빠져나간다 [제조업 성장엔진이 멈춘다 ⑤인재유출 심화 <끝>]
2021-09-07 11:20


SK이노베이션 충남 서산 배터리 공장 전경(왼쪽), LG에너지솔루션 충북 청주 오창공장 전경. [SK이노베이션·LG에너지솔루션 제공]

#. 올해 초 캐나다 한 배터리업체는 배터리 관련 임원으로 삼성SDI, LG에너지솔루션 등 국내 배터리 업체 출신 인력을 대거 영입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 업체는 현재 국내 지사 설립까지 추진 중이다.

#. 스웨덴의 노스볼트는 설립 초기부터 국내 배터리 인력을 대거 영입, 국내 배터리업체 직원 다수가 이직해 파장을 일으켰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국내 배터리업체 직원에 이직 접촉을 시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유력업종의 인재유출이 초비상이다. 과거엔 한국 기업을 단기간 추격하려는 중국업체 위주로 이뤄졌다면, 이젠 북미나 유럽 등까지도 인재전(戰)에 뛰어든 양상이다. 배터리 뿐 아니라,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차세대 먹거리로 꼽히는 업종이라면 여지없이 인재유출이 이어지고 있다. 업계는 기업을 넘어 정부 차원에서 인재 유출을 막을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미래 제조업 기반 흔들...연간 4만명 빠져나가 =국내 제조업의 가장 큰 경쟁력은 역시나 인재다. 자원도 시장규모도 기댈 곳 없는 한계 속에서 한국은 뛰어난 인재 육성으로 세계 경쟁력을 키웠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국내 이공계 인력 규모는 절대 수치로는 부족해 보여도 인구 대비 비중으로 보면 세계 최상위권 수준이다. 한국의 연간 이공계 인력 공급 수준은 12.3만명으로, 일본(15.2만명)보다 작고, 미국(46.6만명)과는 격차가 상당하다. 하지만, 인구 1만명당 이공계 인력 공급 수준으로 비교하면 한국은 24명으로, 미국(15명)을 크게 웃돌고 있다. 일본(12명)보다 2배 많고, 기술강국인 독일(22명)보다도 많다. 전체 인구 대비 이공계 인력 비중으로는 세계 최상위권이란 의미다.

문제는 이렇게 경쟁력을 갖춘 인재가 대거 유출된다는 데에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이공계 인력의 국내외 유출입 수지와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이후 국내 유입되는 이공계 인력은 매년 4000명 수준으로 정체돼 있다. 반면, 유출되는 인력은 연간 4만명 수준에 이른다.

심각한 인재 유출 추이는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의 조사 결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IMD의 ‘두뇌유출 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4점을 기록, 주요 64개국 중 43위를 차지했다. 두뇌유출 지수는 10점에 가까울수록 국내 취업한 인재가 많고 0점에 가까울수록 해외로 빠져나간 인재가 많다는 걸 의미한다. 미국(6.4점·6위), 독일(6.6점·9위), 일본(5.2점·27위) 등 주요국에 비해서도 인재 유출 정도가 심각한 수준이다.

▶고연봉으로 유혹...K배터리 인재 유출 초비상 =최근 들어 가장 인재유출에 비상이 걸린 분야가 바로 배터리다. 전기차 확산세 등에 힘입어 배터리는 최근 1년간 150% 이상 세계 시장 규모가 커질 만큼 가파른 성장세다. 단기간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인력 수요가 급증한데다 세계 시장 34% 가량 점유하며 시장을 이끌고 있는 K배터리에 중국이나 유럽 등이 빠르게 추격하면서 인재 유치 경쟁이 한층 뜨거워졌다.

지동섭 SK이노베이션 배터리사업 대표도 최근 ‘스토리 데이’ 행사에서 최우선 과제로 “인력 확충”을 꼽았을 정도다.

업계에 따르면, 배터리업계 세계 1위 업체인 중국 CATL은 대규모 채용을 진행하며 한국 인재를 대상으로 기존 연봉의 3~4배에 이르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부장급 이상 직원엔 한화 기준 세후 3억원 가량의 연봉을 제안하고 있다.

해외 기업으로 이직하는 것 외에 국내 기업이 해외로 생산거점을 옮기면서 국내 인력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경우도 급증하고 있다. 해외 기업으로 인재를 뺏기는 사례는 아니지만, 이 역시 국내 제조업 생태계 관점으로 보면 상당한 인력 유출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20~2025년간 국내 배터리 3개사(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이노베이션)의 총 인력 유출 추정치는 6.7만~7.5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김용춘 한경연 고용정책팀장은 “국내 2차전지 제조사가 미국, 유럽, 중국 등을 중심으로 투자를 확대하고 있으며 2018년 이후 국내 대규모 증설이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AI, 반도체 등 차세대 먹거리마다 인재戰=최근 주요 기업들마다 대규모 투자를 강행하는 AI도 인재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맥킨지에 따르면, 기존 산업과 AI가 접목되면 연간 최대 5조8000달러 규모의 경제적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다보니 AI 인재라면 앞다퉈 유치에 뛰어들고 있다. AI 관련 주요 학술대회마다 주요 글로벌업체가 대거 참석, 현장에서 AI 인재를 대거 스카우트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AI란 이름만 붙여 있다면 무조건 채용한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AI 인재 경쟁이 치열하다”며 “수요에 비해 공급이 크게 부족하니 상당 기간 이 같은 경쟁은 계속될 것”이라고 전했다.

세계 각국이 국가사업으로 육성하는 반도체 역시 인재 유출이 심각하다. 특히 2025년까지 반도체 산업에 170조원을 투자하기로 한 중국이 ‘블랙홀’처럼 인재를 유치하고 있다. 중국 반도체업체 푸진진화(JHICC)는 최근 인력 채용 공고에서 ‘경력 10년 이상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엔지니어 우대’라고 직접 사명까지 거론하기도 했다.

중국 기업은 동종업종 재취업 금지를 피하고자 투자회사나 자회사 등으로 반도체 인재를 영입하는 편법을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반도체 기술 인재 유출은 정확한 통계로도 파악되지 않는 실정이다.

인재유출은 기술유출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대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중국은 천인계획(千人計劃)이란 이름으로 핵심인재가 해외에서 국내로 돌아올 시 1.7억원 상당의 정착금과 주택, 의료, 교육 등 12가지 파격적 혜택을 보장해주는 ‘인재 리쇼어링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미국 유학생 상당수가 이 제도 이후 중국으로 귀국했다. 인도는 신규 스타트업에 파격적인 창업 혜택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고급 인력 복귀를 유도하고 있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힘들게 키운 석박사급 고급인력도 중국, 미국, 유럽 등으로 매년 유출되고 있다”며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인재를 확보하려면 해외와 비슷한 수준의 처우를 제공해줘야 한다”고 밝혔다. 김상수 기자



dlc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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