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플러스] ‘좀비 민주주의’ 바이러스 확산 주의보
2021-09-14 08:02


[123rf]

[헤럴드경제=신동윤 기자] “서구 민주주의가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다.”

영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런시먼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냉전 종식 후 약 30년간 인류를 지배했던 ‘서구 민주주의’ 이데올로기가 최근 흔들리기 시작한 모습을 이처럼 표현했다.

런시먼 교수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새로운 형태의 ‘쿠데타’가 세계 각국에서 빈발하고 있다며, 이런 현상을 ‘좀비 민주주의’의 확산이라고 지적했다.

겉보기엔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선거가 주기적으로 잘 치러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론과 시민사회의 견제 기능을 공권력과 정보기관을 동원해 마비시키고 정권에 우호적인 ‘가짜뉴스’ 생산 등으로 여론을 조작해 집권을 연장하는 권위주의 정권의 모습을 과거에 비해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권위주의 정권에게는 좀비 민주주의를 마음 놓고 퍼뜨릴 수 있는 기회로도 작용하고 있다. 바이러스의 확산 방지를 위해 정부에 권한을 집중하고, 일정한 수준의 사회 통제를 용인하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모습. [로이터]

서구 민주주의의 맹주국임을 자처하는 미국 역시 위기 상황임을 인식하고는 있다.

하지만, 정치적 분열과 경제 위기 극복 등 내부적 문제와 아프가니스탄 사태 등으로 의심받는 글로벌 리더십 문제 해결 등 산적한 문제 탓에 서구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해결책 마련에 몰두하긴 쉽지 않은 모양새다.

대놓고 독재 대신 교묘하고 세련되진 독재

미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는 권위주의 21세기형 독재자들의 모습이 과거에 비해 진화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전제군주제 국가, 중국·쿠바·북한·베트남 등 공산권 국가처럼 민주적인 선거제도 자체를 부정하거나 미얀마처럼 군부 쿠데타 등으로 민주 정부를 물리적으로 전복해버리는 체제들과 비교했을 때 좀비 민주주의 국가의 통치 방식은 훨씬 세련되다는 것이 포린어페어스의 평가다.

포린어페어스는 좀비 민주주의가 성행하는 대표적인 국가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을 꼽았다.

대통령·국회의원 선거가 정해진 시기에 정확하게 치러지고 있지만, 정보기관과 공권력을 동원한 정권이 시민·사회단체의 활동을 교묘하게 탄압하고, 반(反) 정부적 성향의 인사들을 선거에 출마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제거하는 형태의 일들이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

푸틴 대통령의 ‘정적’으로 꼽히는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지난해 8월 독극물 중독 증세로 쓰러져 독일에서 치료를 받은 뒤 올해 1월 귀국했다가 곧바로 체포됐고, 뒤이어 열린 재판에서 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이달 중순 총선을 앞두고 러시아에서는 푸틴 대통령을 비판해온 언론인과 야권 운동가 등의 해외 도피가 이어지는 것으로 전해졌다.

영국 더 타임스는 “수많은 언론인과 나발니의 대변인·변호사 등이 겁을 먹고 러시아를 떠났다”며 “현지에 남은 이들의 가족, 친척 등이 러시아 비밀경찰의 협박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여기에 러시아 통신 감독 당국은 나발니 관련 사이트 약 50개를 차단하고, 반정부 인사들과 관련된 앱·소셜미디어(SNS)에 대한 접근을 차단할 것을 미국 IT 업체 구글·애플 등에 요구하기도 했다.

이 결과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은 2008년 이후 가장 낮은 26%의 지지율을 기록 중이지만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손쉽게 차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 러시아 야당 정치인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이뤄진다면 지금 우리가 하는 선거의 결과와는 매우 다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럽·중남미는 물론 홍콩까지 퍼진 좀비 바이러스

문제는 좀비 민주주의 바이러스가 세계 각 대륙으로 번지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서구 민주주의의 본고장으로 불리는 유럽연합(EU) 내부에서도 좀비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한 권위주의 정권이 싹트고 있다.


[이코노미스트]

헝가리에서 10년 넘게 집권을 이어오고 있는 우파 권위주의 지도자 오르반 빅토르 총리가 대표적 인물이다.

오르반 총리는 지난 1998년 첫 총리에 취임한 이후 3연임에 성공하는 과정에서 정부 비판 언론을 탄압하고 정권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판사를 교체해 사법부를 장악하며 강력한 권한을 구축했다. 여기에 의회 다수당의 지위를 활용해 여당에 유리하도록 선거제도를 고치며 겉으로 보기엔 ‘합법적’으로 정권을 이어가고 있다.

내년으로 예정된 총선을 앞두고는 코로나19 팬데믹을 이유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 언론통제법을 통과시키는 등 독재에 가까운 친정 체제를 굳히고 있다.

이 밖에도 같은 EU 회원국인 폴란드에서도 정권을 장악한 우파 연합이 언론의 자유에 재갈을 물리는 등 권위주의적 성격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미국의 뒷마당’으로 불렸던 중남미 국가에서도 좀비 민주주의의 확산세가 심각하다.

4연임이자 통산 5선에 도전하는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이 이끄는 니카라과에선 오는 11월 대선에 앞서 계속되는 야권 탄압 속에 고국을 등지는 이들이 계속 늘고 있다.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인과 야권 정치인, 기업인 등이 줄줄이 체포돼 수감되거나 가택연금 상태에 빠지고 있는 가운데, 국제사회의 비판에도 아랑곳 않는 오르테가 정권의 폭주에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외국으로 잇따라 망명길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웃 국가 엘살바도르에선 헌법이 규정한 대통령 연임 금지 조항을 우회하는 새로운 조항을 대법원이 나서 가결, 나이브 부켈레 대통령이 2024년 대선에서 재선에 도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니카라과와 엘살바도르를 비롯해 권위주의 체제가 강화되고 있는 온두라스와 과테말라를 묶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골칫거리”라고 평가했다.

이 밖에도 ‘중국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인 홍콩에서는 ‘애국자가 다스리는 홍콩’이란 기조 아래 홍콩 행정장관과 입법회(의회) 의원을 뽑는 선거인단(선거관리위원회) 구성원을 친중 인물로 채우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자체 분석 결과 선거인단 총 1500석 중 최소 1006석이 친중 인사로 채워질 것”이라며 “내년 3월 홍콩 차기 행정장관 선거에서 중국이 절대적인 통제권을 쥐게 됐다”고 설명했다.

제 코가 석자인 서구 민주주의 ‘맹주국’ 미국

국제 사회 지도국으로서 미국의 귀환을 선언한 바이든 행정부도 서구 민주주의가 처한 위기 상황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새다.

오는 12월 화상으로 ▷권위주의 대응 ▷부패 척결 ▷인권 수호 등 3개 주제를 다룰 ‘민주주의를 위한 정상회의(Summit for Democracy)’를 개최하겠다고 나선 것의 기반에도 이 같은 문제의식이 깔려있다.


[프리덤하우스 자료]

개최 배경을 설명하며 백악관은 “바이든 대통령은 민주주의가 국민의 삶을 개선하고 세계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보여주는 게 우리 시대의 도전이라 말해왔다”며 “전 세계 민주주의 파트너들을 규합하며 동맹을 재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아프간 사태 처리 과정에서 동맹국과의 신뢰에 상처가 생긴 것은 물론이고, 코로나19 델타 변이 확산에 따른 경제 침체 우려 등으로 국내에선 집권 후 최저 수준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 바이든 행정부가 서구 민주주의 재건이란 거대 담론을 실현할 여유가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바이든 행정부는 당장 아프간 사태와 관련해 의회 차원의 청문회나 국정 조사 등을 피하기 힘들 것”이라며 “이들 문제를 무사히 넘긴다 할지라도 코로나19 확산 방지 대책 마련, 허리케인과 산불 등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 복구, 3조5000억달러(약 4055조원) 규모 인적·인프라 예산에 대한 민주당 단독 처리 등의 내정 문제가 산적한 상황”이라고 보도했다.



realbighead@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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