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사색] 랑거와 고진영
2021-11-03 11:21


“시간의 아버지(Father Time)가 째깍대며 나이를 재촉하고, 몸도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다. 45승이라는 대기록을 따라잡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진다.”

환갑을 훌쩍 넘긴 64세 골퍼는 이렇게 엄살을 부리고는 석 주 만에 미국프로골프(PGA) 챔피언스투어 최고령 우승을 차지했다. 그가 말한 45승은 헤일 어윈이 보유한 챔피언스투어 개인통산 최다승을 얘기하는 것인데, 그는 이날 42승째를 쌓아올리며 대기록에 3승 차이로 바짝 다가섰다.

독일 골프의 전설 베른하르트 랑거는 50세 이상 선수들이 뛰는 시니어투어의 절대강자다. 챔피언스투어 올해의 선수상을 8차례나 품었다. 1986년 남자골프 세계랭킹 시스템이 가동됐을 때 초대 세계 1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지난 8월 자신의 생일엔 64타를 쳐 골퍼들의 로망인 ‘에이지슈트(자신의 나이와 같거나 적은 타수)’도 기록했다.

랑거의 업적을 더욱 빛나게 하는 건, 그의 철저한 자기관리다. 미국 매체들은 잊을 만하면 ‘랑거처럼 오랫동안 좋은 골프를 칠 수 있는 4가지 비법’이라든가, ‘랑거가 알려주는 나이 든 골퍼들이 알아야 할 6가지 운동’ 등 랑거의 관리법을 소개한다. 그는 대회 때 티타임 3시간 전에 반드시 코스에 도착해 1시간 동안 피트니스센터에 머문다. 자전거와 스트레칭, 복근과 어깨, 다리운동을 각각 정해진 시간만큼 소화한 뒤에야 샷 연습을 시작한다. 40년간 계속해온 루틴이라고 한다. 짐 퓨릭은 그를 “정교하게 튜닝된 독일 기계”라고 했다.

랑거는 말한다. “사람들이 나를 완벽주의자라고 하지만 나는 결코 완벽할 수 없다. 다만 완벽한 경기를 위해 준비하는 그 과정을 너무나 사랑할 뿐이다.”

지난달 LPGA 투어 대회에서 우승하며 4개월 만에 여자골프 세계랭킹 1위 자리를 되찾은 고진영의 생각도 랑거와 많이 닮아 있다. 도쿄올림픽 때 경기력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고진영은 한 달간 주니어 선수처럼 훈련했다고 털어놓았다. 주니어 시절의 훈련이란 “‘이렇게 연습하다가 오늘 내가 죽겠구나’라고 생각할 정도의 연습량”이라고 설명했다.

고진영은 말한다. “우승을 하더라도 결과 자체보다는 내 경기력에 만족했는지 안 했는지를 더 많이 돌아본다. 스윙과 퍼트 모두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대회기간보다 대회를 준비하는 시간이 더 힘들고 더 재미있다. 그런 과정이 내게 큰 성취감을 준다.”

결과 그 자체보다는 끊임없이 담금질하고 단련하는 과정을 사랑한다는 랑거와 고진영의 말은 묵직한 울림을 준다. 탄탄한 기본기와 골프에 대한 열정을 동력 삼아 목표를 향해 조금씩 전진하는 것, 그것이 오랜 선수생활을 통해 그들이 깨우친 ‘완벽’의 모습일 것이다.

선거의 기본인 정책·비전 경쟁은 사라지고 의혹과 막말이 넘쳐나는 대선 정국의 한복판에서, 랑거와 고진영의 얘기는 판타지처럼 들린다. 과정은 됐고, 죽기살기로 싸워 이기기만 하면 되는 ‘오징어 게임’ 대선, 최선도 차선도 아닌 ‘차악’을 뽑아야 하는 비호감 대선의 모습은 유권자들의 인내력을 테스트하는 것 같다. 기본과 과정을 무시하는 건 능력이 없어 요행을 바라는 것이다. 기본과 과정을 사랑하는 건 나와 남을 속이지 않고 긴 승부에서 승자가 되겠다는 뜻이다.

4개월 후 선택될 대한민국 차기 지도자는 기본과 과정의 중요성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후자의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anju1015@heraldcorp.com



랭킹뉴스


COPYRIGHT ⓒ HERALD CORPORATIO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