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RE100’ 논란, 무식함과 당당함
2022-02-09 11:43


대략 3~4년전부터 한국 재계의 최대 화두는 ‘이에스지(ESG·환경·사회·지배구조)’다. 굳이 따져보면 오늘의 ESG는 1990년대 말 경영학계의 화두였던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의 신버전쯤 된다. 기업의 목적은 돈벌이인데, 더 오래 안정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선 기업이 사회적 책임까지 져야 한다는 것이 CSR의 요체다. 여기에 환경·지배구조까지 개선하면, 보다 더 오래도록 안정적으로 기업들이 돈을 벌 수 있다는 주장이 ESG의 거친 개요다. 이 가운데 ‘이(E·Environment)’가 구체화된 것이 ‘알이100(RE100·Renewable Energy 100%)’이다.

‘RE100’은 영국의 한 비정부기구(NGO)가 2014년에 제안한 국제 캠페인이다. 각 기업들이 오는 2030년까지는 60%, 2040년까지는 90%, 2050년까지는 100%의 전기를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를 쓰자는 것이 제안의 골자다. 환경오염을 줄이자는 착한 취지다. 가입 기업이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나이키 등 유명 회사 300개나 된다. 문제는 이들 기업들이 RE100에 가입하면서 납품·협력업체들까지 RE100 가입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강제다. 애플을 예로 들면 ‘아이폰’의 ‘두뇌(AP)’를 파는 삼성전자, 카메라를 파는 LG이노텍, 화면을 파는 삼성디스플레이가 한국에 공장을 두고선 애플에 더이상 납품을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 ‘RE100 이슈’의 핵심이다. 아주 먼 미래 얘기도 아니다. 지난 2018년 BMW는 배터리 계약 과정에서 LG화학에 ‘RE100 충족’을 조건으로 달아 계약이 불발됐고, 애플도 2020년에 SK하이닉스에 ‘RE100’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엔 RE100 가입을 선언한 기업이 10여곳인데, 아직 한곳도 세부 계획서를 발표한 곳은 없다. 정부방침 미확정이 주요 원인이다.

한국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한국 공장에서 한국전력이 제공하는 전기를 써서 제작된 제품은 애플과 구글에 물건을 팔 수가 없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2020년 기준 한국의 원자력 발전 비중은 30%에 육박하고, 재생에너지 비중은 6%에 불과하다. 한국 기업들이 구글·애플 등 기업에 납품을 하기 위해선 공장을 통째로 뜯어 해외로 이전해야 할 수도 있는 셈이다. 물론 일반 전기료에 웃돈을 주고 재생에너지를 사서 쓸 수도 있으나 단가가 비싸다. 비싼 전기료는 제품가격에 반영되기 마련이고, 가격이 오르면 제품 경쟁력은 저하된다. 몇 년 전부터 ‘RE100’이 한국 재계의 화두가 된 이유는 준비가 안됐기 때문이다.

얼마 전 대선 주자들의 TV토론에서 ‘RE100’이 언급된 것은 이같은 전후 사정과 맥락이 있다. 관련 논란에 ‘토론이 장학퀴즈냐’, ‘진로이즈백은 아는데 알이백은 뭐냐’는 식의 비아냥은 불필요하다. 원전 확대를 주장하는 후보에게 ‘RE100’ 이슈 대처법을 물은 질문은 타당하다. EU는 최근 원자력을 ‘녹색분류체계(그린 택소노미)’에 포함시켰으나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방사성 폐기물을 완벽히 안전 처리할 기술력을 가진 국가는 아직 지구상에 존재치 않는다. 해법으로 제시된 ‘파이로프로세싱’은 아직은 설계단계다. 관련 토론에 ‘잠비아 수도가 어디냐’는 반박엔 당당함이 묻어 있었다. 윤석열 후보 마저 토론에선 ‘가르쳐 달라’고 했다. 몰랐으면 배우면 된다. 문제는 모르고도 당당하단 점이다. 이러면 답이 없다. 큰 선거는 정상인의 사고 능력을 정지 시킬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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