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치의 비극’?…서방 vs 러시아 영토전쟁 빌미되다[글로벌 플러스]
2022-03-22 11:14


1990년 12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왼쪽)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헬무트 콜 독일 수상이 ‘2(동·서독)+4(미국·영국·프랑스·소련)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이 7쪽 짜리 문건은 독일의 40년 분단 역사의 종지부를 찍었다. 동독에서 소련군 철수, 서독에서 병력 감축 등이 담겼지만 나토 동진 금지는 명문화되지 않았다. [DW]

“모든 방향으로 국가를 확장시킨다”

17세기 중반 러시아 외무장관 오르딘 나시초킨이 규정한 러시아의 외교관(觀)이다. 300년도 더 지난 이 말은 지금의 러시아에게도 여전히 유효하게 들린다. 러시아는 2008년 8월 조지아(옛 그루지야), 2014년 3월 크림반도에 이어 2022년 2월에는 우크라이나까지 서쪽으로 팽창했다.

그리고 그 대척점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자리하고 있다.

러시아는 줄곧 유럽의 군사동맹인 나토의 개방정책이 자국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주장해 오고 있다.

한 달여 동안 이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 역시 서방과 나토의 배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서방과 러시아(소련) 지도자들 간에 1990대에 이뤄진 ‘약속’을 서방이 깨버렸기 떄문이라는 것이다.

나토는 1949년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등 12개국이 전후 러시아의 유럽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출범한 군사동맹이다. 1990년 독일 통일, 1991년 소련 해체를 거치며 회원국은 30개국으로 늘었다.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옛 소련 주도 군사동맹인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과 발트3국 등 동구권 국가들도 합류했다.


‘1인치’ 영토 싸움

러시아는 미국과 서방이 30년 전 독일 통일(1990년 10월) 때 “나토는 1인치도 동쪽으로 확장 안 한다”고 해놓고 계속 어겼다고 주장한다.

미국과 나토는 구소련과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다고 일축하고 있다. 많은 전문가는 러시아가 그런 주장을 하는 이유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과 미국의 41대 조지 H. W. 대통령 당시 재임했던 제임스 베이커 전 미 국무장관의 발언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양(兩)진영이 맺은 어느 협정·조약에도 이런 문구가 명문화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베이커 전 국무장관이 통일 독일의 최종 지위와 나토 가입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90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모스크바에서 만났을 당시 베이커 전 장관은 나토의 관할권이 동쪽으로 1인치도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고르바초프는 베이커로부터 이 ‘1인치 약속’을 세 번이나 들었다고 했다.

미국이 러시아에게 나토가 1990년 수준에서 확장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는 건 미국 국무부 문건에서도 나타난다고 독일 도이체벨레(DW)는 지적했다. 하지만 베이커의 이 발언이 백악관에서 파장을 일으키면서 서방측은 이후 베이커의 발언에 대해 부인하고 나섰다. 결국 독일 통일 최종 합의 문구에서 나토 동진은 빠졌다. 결국 나토는 통독(統獨) 이후 5차례에 걸쳐 구(舊)소련권의 중·동부 유럽국가 14개국을 새로 받아들였다.

1994년 러시아·미국·영국은 ‘부다페스트 각서’를 체결했다. 신생 독립국 우크라이나가 자국에 배치된 1900개의 러시아 핵탄두를 러시아로 보내는 대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주권·국경을 존중하고, 대신에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하지만 2014년 푸틴은 크림 반도를 강제 합병했다,

이후 나토는 2008년 부쿠레슈티 정상회의에서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의 가입을 공식 환영했다. 즉각 러시아는 조지아를 침공, 친러시아 지역인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를 분리 독립시켰고, 그로부터 14년만에 우크라이나에 전면전을 감행했다.


우크라이나, 나토 가입 ‘뜨거운 감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요건 중 하나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포기라는 데 이견이 없다. 러시아 침공 임박 전까지 나토 가입을 지속 추진하겠다며 희망의 끈을 놓치 않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최근 발언에서 “나토 가입이 불가능한 것을 안다”며 한발 물러섰다.

러시아는 초안 단계인 종전 협상문에 앞으로 20~25년 간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중단, 민족주의 세력 아조프 부대 해체, 돈바스(도네츠크, 루한스크) 지역 독립 인정 등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2019년 5월 취임 때 야심찬 포부와는 정반대의 그림이다. 당시 주 우크라이나 한국대사관의 동향 보고를 보면 그는 대통령 취임식에 서방 인사들만 불렀을 뿐 러시아 인사는 아예 초청하지 않았다. 그는 취임사에서 “잃어버린 영토(크림) 회복, 나토 표준을 만들겠다”고 공표했다. 우크라이나어 사용 의무화를 제정, 소수 민족과 일부 국경 지역에서까지 모든 학교에서 우크라이나어로 수업 할 것을 강제했다. 러시아계 주민이 상당수 있지만 러시아 색깔을 아예 빼려고 한 것이다.

2014년 크림반도가 러시아에 의해 강제병합된 뒤 우크라이나 다수 국민들 사이에서 반러 정서가 크긴 했다. 하지만 자강(自强)이나 서방의 뚜렷한 안보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노골적인 적대 외교가 얼마나 위험한 지 우크라이나의 비극이 보여준다.

나토는 이번 전쟁에 불개입 원칙을 지키고 있다. 이는 나토 규약 5조(동맹국에 대한 무력 공격을 전체 동맹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는 집단안보 원칙)에 근거한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지난 17일 독일 베를린에서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과의 기자회견에서 “나토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미국 역시 우크라이나 측의 자국 영공에 대한 ‘비행금지구역(no-flight zone; NFZ)’ 설정 요구를 거부했다.

한지숙 기자



jsh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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