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대통령의 일머리
2022-04-15 11:14


성공의 경험이 때론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자신만의 ‘빌드업(후방부터 패스로 볼 점유율 높이기) 축구’를 앞세워 대한민국의 10회 연속 월드컵 진출을 이뤄낸 벤투 감독도 마지막 아랍에미리트 경기에선 충격적 패배를 당했다. 상대는 우리의 전술을 꿰뚫고 있었고 강력한 압박으로 패스의 길목을 차단하며 빌드업을 무력화시켰다. 월드컵 본선에선 한 차원 높은 압박능력을 지닌 나라들과 만난다. 빌드업 위주의 플랜A가 통하지 않을 때 대처 가능한 전술적 유연성을 높여야 승산이 있다. 이번 패배는 그래서 몸에 좋은 쓴 약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권력의 외압에 ‘어퍼컷’을 날리는 ‘강골 검사’로 국민적 신망을 얻어 정계 입문 8개월여 만에 ‘대한민국 최고지도자’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대선 공약이었던 대통령 집무실 광화문 이전을 용산 국방부청사로 급변침하면서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윤 당선인이 ‘일을 잘할 것’이라는 기대치는 50% 안팎으로, 보통 80% 안팎이던 역대 당선인을 크게 밑돈다. ‘제왕적 대통령 종식이라는 명분에 반대할 국민은 없다’는 자신감으로 상대(대선 때 이재명을 찍은 47.8%와 중도층)의 공감없이 과속질주한 데 대한 일침이라 하겠다. “제왕적 대통령을 없앤다고 하면서 그 방식은 제왕적”이라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윤 당선인 특유의 돌파력과 아무도 못 말리는 직진 성향은 거악과 싸울 땐 큰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정치 영역에서는 선악의 잣대로 한 칼에 재단할 사안이 거의 없다.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는 논쟁적 사안이 대부분이다. 충돌하는 이해와 갈등을 조정하고 국민적 합의가 어느 정도 모아졌을 때 비로소 동력을 얻게 된다. 벤투 감독은 고유의 빌드업 축구로 좋은 성적을 냈지만 강팀이 즐비한 월드컵 본 무대에선 상대 맞춤형 전술을 따로 준비하고 있다. 직진 본능으로 대권을 거머쥔 윤 당선인도 정치 본 무대에선 때에 따라 플랜B를 준비하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항로를 급격히 바꾸는 데 따른 정치적 리스크는 대통령 집무실만의 문제가 아니다. 윤 당선인은 현 정부의 부동산 민심이반에 편승해 대선에서 승리했다. 그래서 현 정부와 거꾸로 가면 집값을 잡을 수 있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부동산은 인간의 이기적 욕망, 통화 유동성, 가계부채 등이 얽힌 고차방정식이다. 재건축 규제 완화 소식에 모처럼 잠잠하던 서울 강남 부동산이 다시 들썩인다. LTV 70% 상향은 금리상승기와 맞물려 1900조원에 육박하는 가계부채를 짊어진 한국 경제를 수렁에 빠뜨릴 수 있다. 규제 완화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정교한 로드맵 없이 정책의 키를 좌에서 우로 확 꺾으면 또다시 항로를 벗어나 표류할 수 있다.

안배는 없고 오로지 실력만이 기준이라는 윤 당선인의 ‘마이웨이’ 인사스타일도 정치무대에선 통하기 어렵다. 초대 내각 후보에 ‘40년 지기’(정호영 보건복지)와 아끼는 고교 후배(이상민 행정안전), 검찰 핵심 측근(한동훈 법무) 등 당선인과 가까운 사람이 여럿이다. 오로지 실력만으로 이들을 뽑았다고 믿을 사람은 많지 않다. 국민은 통합과 포용, 참신성에 감동한다. 윤 당선인은 국정경험이 없다는 우려에 “한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검찰총장)에 오른 사람은 일머리가 있다”고 답했다. 검찰에서 정치로 무대가 바뀐 상황에서도 유효한 말이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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