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악관현악단의 ‘탐하고 탐하다’는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작업이 공존하는 무대다. 이 공연에 참여한 한국음악을 대표하는 박범훈 김대성 황호준 등 세 작곡가는 이 모든 것이 “지금의 음악”이라고 강조한다. [국립국악관현악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시간의 역사’ 속에 음악이 있다. 사람으로 치면 ‘MZ세대’. 국립국악관현악단의 29년은 지난한 개간사업이었다. 스물아홉 해 동안 척박한 ‘음악적 토양’을 가꾸기 위해 부지런히 토대를 다졌다. 전통 위에서 동시대와 호흡할 ‘창발성’을 가진 작곡가를 발굴하고, 역량있는 지휘자들과 호흡했다. 이를 통해 실험과 파격이라는 거름을 줬다.
오랜 시간 ‘국악’과 ‘관현악’이 나란히 따라오는 이름은 생경했다. 전통음악과 서양 오케스트라 형식의 만남. 해금, 가야금, 거문고, 소금, 태평소에 첼로와 더블베이스, 서양의 타악기가 어우러진다. 사람들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따라왔다. 때로는 입속 모래알처럼 이물감이 컸다. 1964년 첫 국악관현악단이 생긴 이후로 꽤 긴 시간이었다.
후발주자와도 같은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짧을 수도, 길 수도 있는 시간 동안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해왔다. 그 과정에 악단이 위촉한 ‘국악관현악’ 작곡가들이 있다. 작곡가를 찾아 위촉하고, 신작을 개발하고, 시대성을 담은 공연을 올리며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그 중심에 있는 작곡가가 악단의 초대단장을 지낸 박범훈(75)과 김대성(56), 황호준(51)이다. 세 사람과 함께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오는 31일 ‘탐하고 탐하다’(국립극장 해오름) 무대를 올린다.
공연이 흥미롭다. 지난 2012년 국립극장 레퍼토리 시즌제 도입 이후 무대에 오른 공연 중 ‘연주 횟수 톱3’에 드는 작곡가들의 곡과 이들의 신작이 어우러지는 무대다. 서로 다른 세대의 작곡가들이 만든 국악관현악의 어제이면서 오늘이자 내일의 음악이 자연스럽게 담긴다.
최근 국립극장에서 만난 황호준은 “그 시절 가장 첨예했던 창작의 에너지가 응축된 곡들 중 시간을 쌓아 반복해, 당대의 현재와 끊임없이 만나게 하는 작업”이라며 “우리식 클래식이라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성찰이 담겼다”고 말했다.
한평생 국악관현악의 발전에 헌신한 한국음악계의 거장 박범훈은 국립국악관현악단과의 ‘탐하고 탐하다’ 무대에서 최다 연주작인 ‘오케스트라를 위한 뱃노래’와 신작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가기게’를 들려준다. [국립극장 제공]
■ 생명력을 안고 성장한 국악관현악 톱3
무대에선 30년의 시간이 흐른다. 1994년부터 2023년까지, 한 무대를 위해 작곡한 세 작곡가의 이전곡과 최신작이 함께 오르기 때문이다.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서 가장 많이 재연된 세 곡은 악단의 뿌리를 단단히 하면서도, 그 때마다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곡이다.
가장 오랜 시간을 품은 ‘오케스트라를 위한 뱃노래’는 박범훈의 곡이다. 그는 한국 창작음악의 기초를 다진 산증인이다. 이 곡은 1994년 한국, 중국, 일본 3개국 연주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아시아’ 창단 연주회에서 초연됐다. 박범훈은 “그 당시 각 나라의 맛이 나면서도 함께 연주할 수 있는 곡을 쓰기 위해 한중일의 대표적인 민요를 주제로 각각 곡을 썼다”고 말했다. 이 곡은 경기민요 ‘뱃노래’를 주제로 했다. 거대한 배가 망망대해를 헤치고 나가는 모습을 묘사하는 이 작품은 화합의 의지와 진취적 기상을 다진다.
김대성의 재연곡은 2019년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위촉한 ‘금잔디’다. 해마다 한 번씩 네 번 무대에 올랐다. 이 곡은 지방 악단에서도 수차례 연주되며 대중과도 가까워진 국악관현악이다. 김대성은 “애초 3~5분의 짧은 곡을 의뢰받았는데 이야기를 하다 만 것 같아 8분 길이의 곡으로 만들었다”며 ”마음을 비우고 썼는데 이렇게 인기가 있을 줄은 몰랐다”며 웃었다. 김대성에겐 ‘효자곡’이다. 험난한 역사를 견딘 고구려의 고난과 아픔을 통해 민중의 삶을 그렸다. 김대성은 “우리 장단을 쉽게 풀고 대중이 좋아할 만한 멜로디를 넣는 등 사람들의 귀에 쏙쏙 들어오도록 시도해본 곡”이라고 했다.
‘새야 새야 주제에 의한 국악관현학 바르도’로 대한민국 작곡상(2019)을 받은 황호준은 2021년 ‘이음 음악제-상생의 숲’에서 위촉 초연한 ‘이슬의 시간’을 다시 선보인다. 이 곡은 “작곡가의 강렬한 의도와 욕망을 담아낸”(황호준) 이전 곡(바르도)과는 다른 지점에 있다. 황호준은 “작곡이라는 것이 작곡가 자신이 곡을 쓰는 장소, 혹은 공간 안에서 은밀하게 이뤄지는 사적 작업이라고 본다면, 어떤 곡에든 작곡가가 살고 있는 시간과 체득된 경험이 반영된다”고 말했다. ‘이슬의 시간’은 황호준이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해, 새벽녘 풍경을 처음 접하며 쓴 곡이다. 악단에선 지난 2년간 네 번이 연주되며 단골 레퍼토리로 자리잡았다.
음악계에선 초연 이후 사라지는 곡이 90% 가까이 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수년간 무대에 올랐다는 것은 이들의 음악이 과거가 아닌 ‘지금의 음악’으로 교감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박범훈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뱃노래’는 초연 이후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선 2018년까지 11번 무대에 올랐다. 박범훈의 제자이기도 한 황호준은 “학생 시절 선생님께서 이 곡을 막 쓰시기 시작하셨을 때 연필로 직접 그린 원본 악보를 보여주며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해주신 기억이 난다”며 긴 세월을 돌아봤다. 박범훈은 “국악관현악을 작곡해 꾸준히 무대에 올리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작곡가들에겐 연주 가치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시공을 초월해 계속 남을 수 있는 작품, 장수해 계속 연주되고자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기에 이번 무대가 각자에게도 의미를 가진다”고 말했다.
김대성은 우리 음악 고유의 미학과 철학을 국악·오페라·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에 담아내며 한국음악의 지평을 넓혀온 작곡가다. 그는 이번 공연에서 2019년 초연작 ‘금잔디’와 신작인 교향시 ‘동양평화’를 들려준다. [국립극장 제공]
■ 3인 3색 ‘신작 열전’
“작곡은 자기의 생각을 소리로 쓰는 소설이에요. 이야기를 소리로 만드는 거죠.” (박범훈)
오선지 위에 적힌 소설엔 작곡가 개인의 역사가 담긴다. 박범훈은 “음악을 만드는 것은 ‘유에서 무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유에서 유가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내 안에 가진 것이 나오는 작업”이라는 의미다.
신작 작업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을 살아가는 각기 다른 세 작곡가는 저마다의 유산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국악관현악 역사상 전례없던 시도(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가기게’)가 나오고, 치열했던 역사의 한복판에서 오늘을 반추(교향시 ‘동양평화’)하고, 개인의 사유 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에렌델’). 세 작곡가의 신작은 이들이 꾸준히 탐구해온 지난 음악의 확장판이자, 지금 추구하는 음악의 완성본이다.
박범훈은 스스로가 ‘국악관현악의 역사’다. 무수한 시간을 함께 하며 실험하고 도전했다. 그 과정에서 한계에 직면했고, 그럼에도 ‘국악 대중화’의 꽃을 피웠다. 태동과 번성을 함께 했고,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해야 하는 지금 그는 “국악관현악은 국악관현악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국악관현악의 본질과 정체성을 고민해야 할 때라는 것이 원로 작곡가가 제시한 방향이다. 이런 고민과 함께 “사물놀이, 춤, 합주 등 가무악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국악관현악만의 특징을 바탕으로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을 ‘최초’로 썼다. 박범훈이 꾸준히 이어온 작업에 바탕을 두고 있기도 하다. 작품의 제목인 ’가기게‘는 해금의 가락을 구음으로 표현한 소리다.
곡에선 새로운 구성이 나온다. 현악을 구성하는 각 파트가 ‘솔리스트’가 된다. 민요 형식을 가져와 각각의 악기가 서로 다른 템포로 주제를 반복한다. 빠른 템포로 돌입할 때, 주제 선율이 나오면 관객과 함께 ‘얼쑤’라고 외치는 것도 관전 포인트다. “국악관현악의 멋은 같이 느끼고 놀아주는 데에 있어요. 지금은 모든 관객이 극장 안에서 숨죽이고 들어야 하잖아요. 국악관현악답게 관객과 호흡하는 곡을 쓰게 됐어요.”
재연 무대에서 ‘고구려의 역사’를 들려준 김대성은 신작에선 구한말로 향한다. “역사적으로 자유롭지 않은 나라에서 역사를 다루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작곡가 김대성의 음악세계를 이끌고 있다. 이번엔 안중근 의사다. 이미 “4~5년 전부터 구상을 시작”, 오랜 시간 공부해 완성한 작품이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에서 영감을 받은 교향시 ‘동양평화(東洋平和)’다.
이 곡은 국악관현악 사상 가장 인상적인 출발로 남을 만한 곡이다. ‘동양평화’는 7발의 총성으로 시작한다. 새로운 형식의 시도가 ‘미래지향적’이다. 전체적인 구성은 ‘영화음악’을 떠올리게 한다. 15분 40초 분량의 교향시는 8발의 총알을 장착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마주한 하얼빈 역에서의 안중근 의사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낸다.
“이 곡을 쓰는 내내 안중근이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떤 일을 했을까를 고민했어요.” (김대성)
‘고민의 해답’을 찾으며 곡 작업도 마무리 됐다. ‘동양평화’엔 그가 작곡한 ‘평화의 동기’가 반복·변주되며 한중일의 평화로 나아간다. 김대성은 과거 “요요마의 ‘실크로드 앙상블’에서 위촉받았을 당시 만들어둔 선율이 이번 작품에서 부활했다”고 귀띔했다. 곡 중간엔 세 번의 총소리가 나온다. 첫 번째는 이토 히로부미, 두 번째는 서양 제국주의, 세 번째는 기형적이고 반민족적인 친일파를 향한 총성이다. 무겁고 진중한 역사이나 그는 “곡은 발랄하고 흥미진진한 부분이 많다”고 했다. “대장간의 합창처럼 총소리가 울리고”, 한국의 아리랑을 비롯해 일본과 중국의 민요를 차용해 음악을 풀어갔다. 메시지도 명확한 곡이다.
“진정한 아시아의 평화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이해, 끝없는 인간애, 이를 위한 안중근과 같은 위대한 실천으로 가능해질 거라고 봐요. 역사를 기억하고 반추하는 과정을 통해 역사는 반복된다는 점을 마주하게 됐어요. 이 음악이 애국심을 고취하면서도 과거를 통해 현재를 돌아보고, 이 사회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어요.”
황호준의 음악은 ‘요즘 국악관현악’이다. 첨예한 논쟁이자 탐구대상이 됐던 ‘국악관현악법’이나 ‘국악관현악의 정체성’도, 역사인식을 담은 거대 담론도 내려놨다. 그는 “조금 더 사적 작업으로 깊이 들어가 이전의 작품들과는 다른 결”인 신작 ‘에렌델’을 내놓았다. “별이 잘 보이는 집에서 바라본 밤하늘에서 발견한 희미한 별 하나”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에렌델’은 고대어로 새벽별, 떠오르는 빛을 의미한다.
“어느날 나사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별 중 가장 오래된 별이 발견됐다는 뉴스를 보게 됐어요. 지구에서 129억 광년 떨어진 최장 거리의 별이죠. 이 별은 초기 별이라 1억년 이상 버티지 못하고 소멸됐을 거라는 나사의 공식 발표였어요. 우리가 본 별 중엔 지금에야 빛이 도달했지만, 이미 생명을 다해 사라진 별이 보이는 거죠. 불교에서 말하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상태인 거예요.” (황호준)
눈앞에 있지만, 사라진 별을 마주하며 ‘시간의 개념’을 고찰했다. 황호준은 “암흑 속에서 태초의 빛이 시작된 순간을 상상하면 고요하고 겸손해지며, 욕망은 하찮아진다”고 했다. ‘에렌델’은 “그런 상태로 떠오르는 현재의 생각이 반영된 곡”이다. 우주의 탄생 과정에서 생성되고 소멸된 별의 이야기에선 “다이내믹의 극단적 대비”는 물론, “소리의 잔잔한 기운을 통해 고요라는 사태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에렌델’의 주인공이 된 소멸한 뒤 도달한 별은 “우리 음악의 본질인 음이 소멸되고 난 뒤에 이어지는 잔향과 여운”으로 펼쳐진다.
다양한 실험과 도전을 통해 장르의 경계를 넘어온 작곡가 황호준은 이번 공연에서 ‘이슬의 시간’과 신작 ‘에렌델’로 관객과 만난다. [국립극장 제공]
■ 지금, 이곳의 이야기…“모든 것이 오늘의 음악”
신작을 작업하는 과정에서 세 작곡가는 각기 다른 고민을 안고 있었다. 고민의 방향은 달랐지만, 그 안에서 공통점이 발견됐다. ‘지금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켜켜이 쌓인 어제 속에서 ‘지금의 오늘‘을 꺼내놓는다. 그렇게 펼쳐놓은 음악은 국악관현악에 제시하는 ‘내일의 얼굴’이기도 하다.
완성된 신작에선 세 명의 작곡가가 바라보는 ‘오늘의 국악관현악’을 만나게 된다. 각 세대의 작곡가들은 국악관현악의 정체성(박범훈)을 고민했고, 주제의식(김대성)을 발현했고, 음악의 본질(황호준)에 더 깊이 다가섰다.
박범훈은 “세 작곡가의 곡에선 저마다의 시대성을 만나게 되는 재밌는 경험이 되리라 본다”고 말했다. 장구한 시간의 길이 안에서 국악관현악은 그것의 형식과 음악을 치열하게 고민하던 시기를 지나고 있다.
“이전 세대는 국악관현악의 정립을 위해 틀을 주장하지만, 지금의 세대는 모든 것을 초월해 작곡가의 생각을 관현악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때가 됐어요. 서양 오케스트라에선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며 관현악의 본질에 맞게 가야한다고 고민하지 않잖아요. 그것이 국악관현악이 가야할 궁극적 방향성이기도 해요.” (박범훈)
‘탐하고 탐하다’는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작업이 공존하는 무대다. 세 작곡가는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지금의 음악”이라고 강조한다.
황호준은 “우리의 모든 작업이 지금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50년 전의 음악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메뉴를 만들어 듣는 것”이라며 “우리는 끊임없이 현재에 살고 있고, 작곡가든 연주자든 그 시점에 첨예했던 것을 최선을 다해 담아내면 그것이 예술행위의 총체적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대성의 작업 역시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역사 안에서 바라보는 현재의 이야기에 방점을 둔다. 그는 “역사는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현재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나아가는 오늘의 작업”이라고 했다.
국악관현악의 뿌리 위에서 꾸준히 이어온 세 작곡가의 음악은 ‘개인의 작업’을 넘어 ‘시대의 유산’으로 자리한다. 음악계의 긴 흐름 위에서 시기마다 굳건한 이정표를 세워둔다.
“70대의 박범훈도 50대의 김대성과 황호준도 지금의 작품을 쓴 거예요. 이것이 내일이면 미래가 되는 거죠. 과거의 곡을 지금의 곡으로 인정한다면 그것이 생명력을 가진 거라고 봐요. 우리는 지금의 음악을 썼으니, 국악관현악도 여기에서 시작하면 돼요. 이 곡들이 관객들과 호흡해 오래오래 ‘오늘의 곡’으로 연주된다면, 그 안에서 과거와 미래를 읽을 수 있을 겁니다.” (박범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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