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드라마 산업구조의 위기 신호[서병기의 콘텐츠 이야기]
2023-07-19 11:11



K-콘텐츠는 여전히 글로벌 무대에서 잘나가고 있다. 하지만 K-콘텐츠의 주력인 한국 드라마가 언젠가는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소리도 업계에서 나온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콘텐츠산업 구조상의 문제다. 이미 위기 조짐은 조금씩 꾸준히 보여왔다. K-드라마는 글로벌 무대에서 호황이라고 하지만 TV 드라마를 제작하는 외주 제작사는 남는 게 별로 없어 드라마산업의 선순환구조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

OTT도 넷플릭스 한 곳만 잘 되고 있을 뿐, 타 글로벌 OTT도 한국 시장에서 제대로 힘을 못 쓰고 있다. 토종 OTT의 고전은 심각하다. 티빙과 웨이브의 연간 적자가 각각 1000억원대를 기록하고 있고, 왓챠도 존폐위기를 맞는 등 플랫폼의 위기도 동반되고 있다. 급기야 티빙과 웨이브가 합병을 협의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K-콘텐츠, 호황이면서 위기 징후...제작비 수직 상승

그런 가운데 최근 몇 년 사이 콘텐츠 제작산업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 하나가 있다. 드라마 제작비의 수직 상승이다. 몇 년 전만 해도 회당 제작비가 7억원 수준이었지만 최근 회당 제작비는 10억원대 수준, 심지어 15억원대까지 치솟았다. 문제는 이를 감당해낼 제작사들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드라마가 성공해도 제작비 ‘리쿱(회수)’이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제작비를 많이 주는 넷플릭스에 줄을 설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다양한 제작사와 다양한 플랫폼이 만들어지는 구조가 아닌 이 같은 단일 모양새는 건강함을 잃은 생태계여서 위험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한 드라마 제작사 대표는 “한국 드라마는 글로벌 OTT인 넷플릭스에 종속되는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다양성을 죽인다는 건 문제”라면서 “국민이 드라마에 대한 보편적인 시청권을 침해받게 됐다. 과거에는 제작비를 많이 들이지 않고도 TV 드라마를 만들었지만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다. 제작비를 건질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글로벌 OTT를 끌어들여 제작비를 ‘오버 베팅’해 ‘오버 수익’을 남기려는 한탕주의 드라마 제작이 통하게 됐다.

일본의 지상파 미니시리즈의 회당 제작비는 2억~3억원 선에 그치고 있다. 물론 회당 제작비가 10억원에 이르는 재패니메이션은 있지만 일반적인 일본 드라마는 적은 제작비로 글로벌 경쟁력을 잃어버렸다. 일본 드라마는 좋은 원작의 리메이크나 시리즈물로 리스크를 분산시키며 안정을 추구한다. 그러다 보니 창의성이 빈곤해진다. K-드라마의 경쟁력 유지는 여기에도 원인이 있다. 한국 드라마의 글로벌 경쟁력을 내수시장 위주인 일본 드라마와 비교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참고할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

일본 드라마 제작 환경, 경쟁력이 떨어진 이유

불과 7~8년 전만 해도 일본 드라마는 한국 드라마보다 퀼리티가 훨씬 높았다. 넷플릭스가 한국에 상륙한 2016년 이전 일이다. 이때만 해도 한국 드라마 제작진은 일본 드라마를 많이 참고했다. 이제는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 최근 제작된 일본 드라마 중 최고의 제작비를 투입한 작품은 ‘이태원 클라쓰’를 리메이크한 TV 아사히 13부작 목요드라마 ‘롯폰기 클라쓰’(2022년 방영)로, 회당 6억원대다. 기존 일본 드라마 제작비의 두 배가 투입된 드라마답게 13화는 자체 최고 시청률인 10.7%를 기록하는 등 인기리에 종영됐다.

일본 제작사의 한 관계자는 한국 드라마가 글로벌 경쟁력을 지닌 이유에 대해 묻자 “없다. 단지 산업구조 차이”라고 설명했다. ‘이태원 클라쓰’와 ‘롯폰기 클라쓰’ 중 훨씬 재미있는 건 ‘이태원 클라쓰’다. 하지만 한국 원작은 일본 리메이크작 제작비의 2배 이상이 투입됐다. 우리도 회당 6억원으로는 ‘이태원 클라쓰’를 만들 수 없다.

일본 드라마는 회당 제작비가 적다 보니 출연료가 상대적으로 낮고 출연하는 배우 숫자도 줄인다. 인간 내면과 감정의 세밀함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일본 스타들이 회당 3000만원대의 낮은 출연료를 수락하는 이유는 CF시장에서의 이미지 유지와 연장 차원이다. 그들에겐 광고모델료가 더 중요하다. 그러니 드라마에서도 CF와 똑같은 분장과 분위기를 보여주려 한다. 파격적인 변신은 사양한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배우들은 돈을 주면 완전 달라져 현장에 나타난다. 일본에서는 윤계상이 영화 ‘범죄도시 1’에서 장첸 역으로 파격 변신한 사례가 나오기 힘들다.

드라마 제작 편수가 계속 줄어들면...

K-드라마의 경쟁력은 당분간 유지되겠지만 지속 가능할 것인지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제작비 상승으로 연간제작 드라마가 100~150개에서 절반 수준인 70개까지 줄어들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지상파에서는 ‘미니시리즈를 만들면 몇억, 몇십억 적자’라는 말도 들린다. 심지어 지상파 3사와 JTBC, tvN 등 케이블 2사 등 소위 메이저 5개 채널 중에서는 광고가 완판됐는데도 적자를 낸 드라마가 있다.

드라마 제작 편수가 줄어들면서 생긴 편성 공백을 예능이 메우고 있다. 예능은 대작도 드라마의 제작비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낮다. 케이블 채널 tvN에서 외국에 나가는 예능들이 우후죽순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해외로 나가는 예능은 여전히 가성비가 높은 편이다.

드라마 제작 편수가 줄어들면 문제는 없을까? 김은숙 작가나 김은희 작가 등 소위 특고(特稿) 작가들은 1~2년에 한 편씩 쓰기에 별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 밑에 포진해 있는 대다수 A, B급 작가는 집필할 수 있는 드라마 편수가 줄어드는 등 타격을 받게 된다. 이들이 새로운 도전을 하거나 창의성을 발휘하기 힘들게 된다.

제작비가 상승하고 창작자들의 처우가 개선되는 건 나쁜 일은 아니다. 언제까지 저가 상품만 만들고 있을 수는 없다. 드라마 제작비가 올라가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고 이치다. 문제는 드라마에 창의성이 뒷받침되고 있느냐다. 아직 K-드라마는 미국이나 영국 등에 비해 가성비가 높은 편이다. 제작비가 올라갔다고 해도 미국 드라마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제작비로 볼 때 한국에서는 대작 드라마나 블록버스터가 미국에서는 독립영화 수준이다. 이제 그런 비교 우위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태국 드라마의 시장 잠식속도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회당출연료 3억~5억원 부르는 배우들이 늘어났다

글로벌 OTT인 넷플릭스가 들어온 지 7년이 되면서, 또 후속 글로벌 OTT들도 한국에 속속 들어오면서 드라마 제작 상황도 달라졌다. 신규 플랫폼이 필요로 하는 양질의 작가, 연출진, 스태프, 배우들을 충분히 확보한 제작사는 퀄리티를 더 높일 수 있었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레벨업이 이뤄지지 못한 드라마도 많아졌다. 특히 인적 비용이 많이 늘어난 상태에서 자본력이 약한 제작사들은 더 힘들어졌다. 최근 1~3년간 사전 제작을 끝낸 드라마 중에서 아직 채널과 플랫폼을 찾지 못하고 창고에 있는 드라마만도 20여편이나 된다. 제작사로서는 이 드라마가 편성을 못 잡으면 회사 존립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드라마의 제작과 편성 편수가 급속히 줄고 있는 상태에서 이런 드라마의 편성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회당 제작비가 7억~8억원을 넘기면 방송사나 제작사가 손실을 떠안아야 하는 구조다. 회당 출연료로 3억 이상을 부르는 남자 배우들도 늘어났다. 그래서 국내는 물론 해외 시청자를 겨냥해 톱스타급을 찾으면 회당 출연료는 최대 10억원대까지 올라간 상태다. 그래도 그런 드라마는 넷플릭스나 디즈니+, 애플TV 등 글로벌 OTT의 오리지널 시리즈가 되거나 라이센싱 드라마가 될 가능성이 크다.

회당 출연료 5억원의 가치가 있는 배우를 캐스팅하면 제작비가 올라가도 성공 확률이 커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다른 배우의 출연료도 함께 올라가 전반적인 제작비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것. 이제 많은 출연료를 요구하는 배우를 캐스팅할 수 있는 지상파와 케이블 채널의 기회는 갈수록 줄어든다. 더구나 배우들도 넷플릭스를 통해 세계적인 배우가 되기를 희망하는 경우도 많아, 넷플릭스가 글로벌 히트작을 낼 가능성이 가장 큰 플랫폼으로 독점적 지위를 갖게 된다. 아직 넷플릭스와 경쟁할 만한 OTT도 나오지 않고 있어 향후 넷플릭스만이 가격결정권을 쥐게 될 것이라는 전망은 매우 우려할 만한 현상이다.

방송국이 드라마를 더욱 차별화해야 할 때

드라마 제작비는 여러 사정에도 올라갈 수밖에 없다. 내수를 넘어 글로벌을 지향하는 한국 드라마가 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작비 상승은 불가피하다. 한곳으로 쏠리지 않고 합리적으로 제작비를 잘 사용해 완성도를 높이면 된다. 이에 더해 방송사들도 드라마 제작 방향을 더 구체적으로 잡아가야 한다. 방송국 성격에 맞는 확실한 차별화를 꾀해야 할 때다.

예를 들어 옥택연 주연의 KBS2 월화극 ‘가슴이 뛴다’는 저예산 드라마 느낌이 난다. 시청률도 2~3%에 그치고 있는 ‘가슴이 뛴다’류의 드라마를 앞으로 계속 제작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 조그맣게 만들어 조그만 시장에서 소비되고 말 것인가, 아니면 KBS2 드라마의 현재의 낮은 경쟁력에 매달리지 말고 사극이나 주말극을 잘 만들어 공영성을 살리는 게 좋은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이 세분화되는 상황에서 KBS 드라마는 상업성보다는 공영성을 살려 국민적 합의를 얻어내는 게 훨씬 더 낫다는 게 중론이다. 그동안 논란이 돼온 TV 수신료 분리 징수가 드디어 시행됐고, KBS는 이에 대한 헌법소원을 냈다. KBS의 재원 확보가 더 어려워질 것이 예상되는 만큼 차별화된 드라마 제작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MBC 드라마도 공영방송 쪽을 강화할 것인지, 상업성을 보강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을 해야 한다. 공영성과 애매하게 섞여 있는 MBC 드라마는 차별성 구조부터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존재감만 약화할 가능성이 크다.

콘텐츠 제작사 SLL의 선전, 드라마업계 주목 대상

드라마 제작 편수가 줄어들면 창의적인 작품보다 리스크 분산이 우선이다. 그래서 성공이 보장된 작가를 쓰게 되고 시리즈물이 자주 나오게 된다. 그런데도 콘텐츠 스튜디오인 SLL은 신인 작가와 시리즈물이 아닌 것으로 성공을 만들어내 주목받는다. 콘텐츠의 차별화를 잘 이뤄낸 결과로 보인다.

JTBC에 드라마 콘텐츠를 공급하는 SLL은 올 상반기 무려 4개의 드라마에 신인 작가를 기용, 히트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사랑의 이해’ ‘대행사’ ‘닥터 차정숙’ ‘나쁜 엄마’ 등은 모두 미니시리즈 데뷔 작가가 집필한 작품이다. JTBC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드라마의 침체기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박준서 SLL 제작총괄은 “2022년 11월 방송된 ‘재벌집 막내아들’부터 효과가 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작품성을 중시했다면 이제 대중성에 대한 고려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토일드라마는 더 그렇다”면서 “올 상반기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닥터 차정숙’은 너무 주말연속극 같지 않냐는 말도 있었다. 주말극이 나쁜 건가. 주말극은 퀄리티가 떨어지는 게 아니라 가족극을 저희만의 방식으로 풀어내고 기존 콘텐츠에 사람들이 좋아하게 하는 대중성을 더한 게 흥행 이유”라고 설명했다.

2020년 4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인간수업’을 기점으로 대한민국 드라마가 달라졌다. 이전에는 이런 드라마를 만들어도 편성해줄 곳이 없었다. OTT가 콘텐츠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드라마다. 두 달 후인 2020년 6월, SBS 금토드라마 ‘편의점 샛별이’가 방송됐지만 일본 만화의 이질감을 고려해도 전자와 비교하면 소꿉장난 수준이다.

‘인간수업’에서 주인공인 공부 잘하는 모범 고교생 지수(김동희 분)는 ‘사이버 포주’로 활동한다. 왜 그런 짓을 하냐고 묻자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한다. ‘인간수업’의 탈선은 기존 학원물과는 차원을 달리할 정도로 일탈의 강도가 세다. 웨이브와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10부작 ‘청담국제고등학교’는 지금까지 나온 학원물 중 재산이 계급이고 서열임을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준 드라마일 것이다. 여주인공도 ‘꽃보다 남자’나 ‘상속자들’에서 볼 수 있는 착한 캔디류 ‘흙수저’가 아니라, 일류대학생을 사칭하는 ‘짭수저’가 되어 버렸다.

이제 갈수록 TV용과 OTT용 콘텐츠의 간극이 커질 것이다. 넷플릭스는 풍부한 자본과 높은 표현 수위로 ‘사냥개들’ ‘셀러브리티’ ‘D.P. 시즌 2’ 같이 강한 극성의 콘텐츠를 계속 제작할 것이다. 하지만 젊은 시청자들이 TV를 안 본다고 단정 지을 게 아니라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방송하지 않은 건 아닌지 한 번 생각해볼 때다. 오컬트 장르인 SBS 금토드라마 ‘악귀’와 MBC 여행예능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는 젊은 시청자를 대거 유입시키며 지상파의 외연을 확장한 콘텐츠다. 드라마를 비롯한 방송 콘텐츠는 어느 한 곳이 독점하는 형태를 띠기보다는 각자도생하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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