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수도의 고려왕, 단군 제사때 마니산서 합숙
2023-08-28 09:34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고려는 몽골 침략이 있던 1232년(고종 19년) 부터, 수도를 강화로 옮긴뒤 농성에 들어갔다가 38년 후인 1270년(원종 11년) 몽골과 고려가 예속적인 장인-사위 국가가 되는 등 내용의 불평등 조약을 맺을 끝에 개경으로 복귀한다. 이를 강도시기라고 한다.

그래서 강화에 가면 남한에서 보기 힘든 고려 왕경 유구들이 적지 않다.


강화읍내에 있는 고려궁지. 피란온 임금이 살던 곳이다.


누란에 직면한 고려 왕이 단군왕검에 대한 제사를 지내기 전에 기거했던 묘지사 터의 온돌구조

조선초에 작성돼 고려의 역사와 강역을 축소하고 폄훼하는 내용이 많은 역사서이긴 하지만 고려사는 고려궁지와 사찰인 묘지사 등 강도시기 유적에 관한한 비교적 객관적인 서술을 해두었다.

묘지사는 1264년(고려 원종 5년) 왕이 단군왕검 제단 마니산 참성단에서 초제(醮祭:무속신앙이나 도교에서 별을 향하여 지내는 제사)를 지내기 전에 거처했던 사찰로, 마니산 동쪽의 초피봉 남사면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산36-27 일원이다.

전(傳) 묘지사지는 산 사면에 축대를 쌓아 조성한 2개의 평탄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난해에 상단 평탄지를 조사한데 이어, 올해 하단 평탄지 등 사역 전반에 대한 조사를 완료하였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전(傳) 묘지사지는 서쪽의 계곡부에서 하단의 평탄지로 진입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하단 평탄지의 마당을 중심으로 북쪽과 동쪽에 건물지가 직각을 이루도록 배치된 구조이다.


마니산 묘지사지 전경


묘지사지 부엌 유구

건물지는 모두 3동이 확인되었는데, 대규모의 중심 건물과 생활시설을 갖춘 부속 건물로 구분되어 있다. 상단 평탄지에 위치한 북쪽의 중심 건물은 경사 지형을 이용한 다락집 형태의 건물지로, 상층에는 대규모의 난방시설을 갖춘 방과 누마루가 설치되었다.

건물의 난방시설은 방 양쪽에 설치된 아궁이를 통해 유입된 화기가 방 전체를 ‘ㄷ’ 형태로 회전하면서 건물 북쪽으로 각각 빠져나가는 구조로, 13세기 전면온돌(방 전체에 깔린 온돌)의 온전한 형태를 갖춘 귀중한 자료로서 주목된다.

이 온돌방에 잇대어 누마루가 설치되었고, 누마루의 하부는 별도의 건물 공간으로 활용된 것도 확인하였다. 이와 같은 다락집(2층집) 구조는 지금까지 동 시기 유적에서 확인된 사례가 없는 것으로, 고려시대 건물 구조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또한 하단 평탄지 동쪽에 나란히 자리한 2동의 부속 건물지에는 내부에 아궁이와 부뚜막, 온돌시설 등이 설치되어 있다. 이 건물지들은 한 지붕 아래에 부엌과 온돌이 있는 여러 개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어 생활공간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차맷돌(차를 가는 데 사용하는 맷돌), 벼루, 찻잔을 비롯한 다양한 기종의 도자류, 다량의 평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로 미루어 보아 전(傳) 묘지사지는 고급청자와 차 문화를 향유한 상위계층에 의해 강도시기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이전까지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강화 전(傳) 묘지사지에 대한 발굴조사 성과 29, 30일 현장에서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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