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이 얼어죽을뻔 했어!” 식은 욕조에 女모델 뒀다가 소송갈 뻔한 사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존 에버렛 밀레이 편]
2023-09-02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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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사랑을 잃고 실성한 소녀

존 에버렛 밀레이, '오필리아'(일부 확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도대체 왜?

햄릿 왕자가 변했다. 늘 사랑을 속삭이던 그가 돌연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결혼을 하려거든 바보에게나 가라고? 아니, 그냥 결혼 따위 집어치우고 수녀원으로 떠나라고? 오필리아는 웅크린 채 울었다. 사실 햄릿의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배신으로 얼룩진 자신의 참혹한 가족사를 알게 된 뒤 홧김에 한 폭언이었다. 하지만 순수한 이 소녀는 사정을 알 리 없었다. 오필리아는 그 날 이후 급격히 생기를 잃었다. 싱그러운 아름다움은 눈에 띄게 시들었다. 한숨을 내쉬고 신음만 내뱉을 뿐, 살아가는 법을 잊은 사람 같았다. 그런 그녀 앞에 곧 새로운 소식이 놓였다. “이런 얘기까지 전해드려 죄송해요.” 성 안팎 소문을 퍼 나르는 꼬마가 숨을 헐떡였다. “아가씨의 아버지, 폴로니어스가 조금 전 성에서 칼을 맞고 죽었다고 해요.” “그게 무슨?” “그리고…. 햄릿 왕자가 급하게 영국으로 떠난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믿을 수 없지만, 둘 다 사실이었다. 첫 소식은 사랑하는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 두 번째 소식은 사랑했던 연인과의 영원한 결별을 뜻했다. 게다가 이번 일이 동시에 일어난 건 혹시 둘 사이에 무슨…? 오필리아는 이번에는 울지 않았다. 외려 웃었다. 사레에 걸린 양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때 오필리아만 들을 수 있는 게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정신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오필리아'

오필리아는 실성했다.

산발이 된 그녀는 매일 숲속 골짜기를 쏘다녔다. 웃고, 울고, 노래를 부르고, 그대로 주저앉아 흐느꼈다. 어느 날 오필리아는 꽃을 여러 송이 꺾었다. 그녀는 이를 엮어 꽃다발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생각난 듯, 개울가에 비스듬히 누운 버드나무 가지로 걸어갔다. 오필리아는 헤실대며 팔을 뻗었다. 꽃다발을 가지 끝에 걸어둘 참이었다. 얄궂게도 그 때 가지가 꺾이고 말았다. 오필리아는 시냇물에 빠졌다.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부르던 노래나 부르며 가만히 떠 있었다. 물 밑 진흙으로 끌려가도 상관없다는 양 얌전히 흘러갔다. 그녀는 차츰 물에 삼켜졌다.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1564~1616)의 작품 '햄릿'에 등장하는 그녀는 이렇게 생을 마감했다.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1829~1896)의 '오필리아'는 언뜻 보면 아름답기만 한 그림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기구한 여인의 비극적 죽음을 담은 작품인 것이다. 밀레이는 이런 암담한 장면을 왜 이토록 생생하게, 왜 이렇게까지 강렬하게 그렸을까.

“이상 말고 현실을!” 라파엘전파 탄생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아담의 창조'(인체를 근육질로 묘사했다.)


라파엘로 산치오, '초원의 성모'(삼각형 구도가 안정감을 더한다.)

'오필리아'의 완성도로 볼 수 있듯, 밀레이는 미술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밀레이는 1829년 영국 사우샘프턴에서 출생했다. 밀레이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온 가족이 그의 될성부른 떡잎을 믿고 런던으로 이사를 올 정도였다. 밀레이는 그 기대에 부응했다. 그는 1838년에 런던 왕립예술원에 입학했다. 고작 11살, 예술원 역사상 최연소였다. 최고의 학교에 온 밀레이는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이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이곳에선 르네상스 회화를 항상 최고로 쳤다. 이는 인간과 자연을 실제보다 아름답게 표현하는 화풍이었다. 가령 인간을 그린다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를 흉내내 근육 묘사에 각별히 힘 쏟아야 했다. 자연을 그린다면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1483~1520)를 따라해 구도와 조화를 맞추기에 정신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과장과 생략이 필수적이었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베아타 베아트릭스'(엘리자베스 시달)


윌리엄 홀먼 헌트, '속죄양(희생양)'

밀레이는 그게 싫었다. 그가 볼 때 이런 식의 그림은 부자연스러웠다. 생생하지도 않고, 인상적이지도 않았다. 밀레이는 예술원에서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1828~1882),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1827~1910)와 친해졌다. 이들도 같은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아예 새로운 조직을 꾸려볼까?” 세 사람은 그렇게 의기투합했다. 1848년, 라파엘전파(前派)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밀레이와 그의 친구들은 작업실 문을 열었다. 이젤을 들고 현장에 직접 뛰어들었다. 눈에 보이는 만큼 세밀하게 표현했고, 보이는 대로 풍부하게 색칠했다. 인간만큼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도 있는 그대로 묘사했다. 인위적인 근육, 인공적인 구도 모두 뒤로 밀어냈다. 라파엘로가 태어나기 전(pre) 유행했던 꾸밈없이 솔직한, 자연 앞에서 겸손한 화풍을 다시 따른 것이었다.


존 에버렛 밀레이, '공기 요정에게 유혹당하는 페르디난드'

예컨대 밀레이의 그림 '공기 요정에게 유혹당하는 페르디난드'를 보면 현장의 냄새가 성큼 다가온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서 영감을 얻은 이 작품에는 근육질이 아닌 비교적 평범한 체형의 페르디난드가 등장한다. 사람만큼 주변의 자연 또한 맑고 뚜렷하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요정이다. 그는 요정마저 '현실적'으로 그렸다. 당시 학교의 가르침에 맞춰 예쁘고 아담하게 그리기를 거부했다. 실제 요정이 있다면 그 존재 중 다수는 박쥐와 비슷할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반항의 깃발을 든 밀레이는 이런 식으로 기성 화단에 맞서기 시작했다.

구세주 존 러스킨의 등장

존 에버렛 밀레이, '부모 집에 있는 그리스도'

밀레이는 라파엘전파의 표본이 될 그림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조직을 꾸린 다음 해부터 모두에게 익숙한 소재를 골라 작업에 나섰다. '성 가족'(Holy Family)이었다. 그는 곧 '부모 집에 있는 그리스도'를 완성했다.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 예수가 있는 장면은 당시 '성 가족'이란 이름으로 흔히 다뤄지는 회화 주제였다. 이들을 더 고결하게, 더욱 성스럽게 그리는 일이 그 시절 암묵적 합의였다. 하지만 밀레이는 그러지 않았다. 일단 배경부터 독특했다.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목공소였다. 아름다운 초원도, 예스러운 건물 안도 아니었다. 그런 다음 성가족을 평범한 목수 가족으로 표현했다. 이들 모습 또한 거룩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투박한 목수 요셉과 남루한 옷을 입은 마리아, 아직 약하고 여려보이는 예수…. 그가 생각할 때 가장 현실적인 성가족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은 것이었다. 밀레이는 세부 묘사를 통해 그림의 완성도를 더 높였다. 이를테면 마리아에게 입맞춤을 받는 예수의 손과 발등에 핏자국을 그렸다. 이는 그가 받을 십자가형을 뜻했다. 요셉 옆 물을 든 소년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자 요한을 의미했다. 이 밖에도 삼위일체의 뜻을 갖는 삼각자가 벽에 걸려있고, 어린 양들이 밖에서 몰려들고 있다.


존 에버렛 밀레이, 'Mariana'

밀레이는 그만의 '성 가족'을 통해 라파엘전파의 지향점을 알리려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밀레이의 파격적 시도는 조롱을 받았다. 그저 신성모독으로 손가락질 당했다. '위대한 유산'으로 곧 이름을 알릴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1812~1870)도 그림 속 예수를 보고 “잠옷을 입은, 목이 구부러진, 멍청하고, 끔찍한 (…) 빨간 머리의 소년”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많은 이가 라파엘전파를 젊은 날의 객기로 치부할 뿐이었다. 권위 있는 평론가 존 러스킨(John Ruskin·1819~1900)이 없었다면 밀레이가 탄 라파엘전파호(號)는 닻을 올리기도 전에 침몰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밀레이와 그 동료들이 영국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갈 것이다.” 깐깐한 러스킨의 파격적 평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러스킨은 나아가 밀레이의 보호자도 자처했다. 밀레이는 그 덕에 용기를 간직할 수 있었다. 꼭 한번 다루고 싶었던 주제도 건드릴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셰익스피어의 역작 '햄릿'이었다.

관찰하고, 또 관찰하고

존 에버렛 밀레이, '오필리아'

1852년, 밀레이는 라파엘전파의 정신에 맞춰 '오필리아' 그림을 계획했다.

일단 늘 그랬듯 밖으로 나갔다. 오필리아가 빠져 죽었을 법한 강가를 찾았다. 몇 개월을 헤맨 끝에 잉글랜드 서리 근교 호그스밀에서 딱 맞는 장소를 볼 수 있었다. 밀레이는 자리를 깔았다. 일대를 반년 가까이 관찰했다. 물살은 언제 세지는지, 무슨 야생화는 어디에서 피는지, 물 위에 뜬 잎과 나뭇가지는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연구했다. '햄릿'에 등장하는 꽃을 들고 와보기도 했다. 그는 주변 풍경을 천천히 캔버스에 담았다. 쉽지 않았다. 변덕스러운 날씨, 개화 시기가 다른 꽃들, 호전적인 풀벌레가 작업을 방해했다. 그럼에도 참고 나아갔다. 고생 끝에 배경을 먼저 완성했다. “이곳의 파리는 근육질이에요. 사람 살에 달려드는 걸 좋아하지요. 최근에는 남의 들판에 무단침입하고, 건초를 망쳤다며 법정에 출두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받았어요. (…) 살인자에게 교수형 대신 이런 곳에서 그림을 그리라고 해도 되겠어요.” 그 즈음 그가 후원자에게 쓴 글이었다. 밀레이는 오필리아 역에 나선 모델도 괴롭혔다. 그는 당시 라파엘전파의 뮤즈였던 19살 소녀 엘리자베스 시달을 불렀다. 물을 가득 채운 욕조에 대뜸 눕혔다. “그대로, 그렇게 있어 주게.” 그녀는 기약 없이 둥둥 떠 있어야 했다. 밀레이는 호그스밀에서 그랬듯 시달을 진득이 관찰했다. 오랜 시간 화폭에 담았다. 그는 욕조 물을 데워주는 램프 불이 꺼진 일도 몰랐다. 시달이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 일 또한 당연히 알 수 없었다. 밀레이가 그림을 다 그릴 때쯤 시달은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시달의 아버지가 밀레이에게 병원비를 대지 않으면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말도 있다.


존 에버렛 밀레이, '오필리아'(일부 확대)


존 에버렛 밀레이, '오필리아'(일부 확대)

밀레이의 '오필리아'는 그렇게 해 나온 결과물이었다. 이런 집착 내지 집념 탓에 '오필리아'는 이토록 생생할 수 있었다. 가녀린 몸매를 강조하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었고, 틀에 박힌 구도 없이도 비극을 우아하게 내보일 수 있었다. 밀레이는 특히 꽃과 나무 등 식물 표현에 끝까지 공들였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숭고함과 섬뜩함을 더하려고 했다. 가령 오필리아의 목에 걸린 제비꽃은 '충절''젊은 날의 죽음'을 뜻한다. 오필리아의 오른손 쪽에서 떠다니는 양귀비는 '깊은 잠', 아도니스 꽃은 '슬픔'의 뜻을 갖는다. 흰색 데이지는 '순결''결백', 맨 오른편의 노란색과 보라색이 섞인 팬지는 '공허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런가 하면 버드나무 가지는 '버림받은 사랑', 가지 뒤편 쐐기풀은 '고통', 그림 오른편 덤불에서 볼 수 있는 해골 모양은 '죽음'을 상징한다. 이 또한 모두 밀레이가 눈이 빠지게 보고 관찰한 것들이었다.

희망과 현실을 한 화폭에

존 에버렛 밀레이, '눈먼 소녀'

'오필리아'를 마무리한 밀레이는 영국 서식스의 시골에서 잠시 머물렀다.

밀레이는 기구한 삶을 산 오필리아의 여운을 여전히 품고 있었다. 그런 그는 이곳에서 또 다른 비극적 생과 마주했다. 거리를 떠도는 금발의 눈먼 소녀와 그녀의 여동생이었다. 밀레이는 홀린 듯 붓을 쥐었다. 이곳에서 그의 '오필리아'만큼이나 아름답고도 비극적인 그림 '눈먼 소녀'가 탄생했다.


존 에버렛 밀레이, '눈먼 소녀'

두 소녀가 황금빛의 너른 들판에서 쉬고 있다.

언니의 무릎 위에는 손풍금이 놓여있다. 이들이 거리의 악사로 밥벌이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저 멀리서 쌍무지개가 떠오른다. 소나기를 피해 언니의 숄을 함께 썼던 동생이 이를 바라본다. "언니. 쌍무지개가 떴어."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언니는 절경을 볼 수 없다. 눈이 먼 탓이다. 언니의 목에는 '장님을 불쌍히 봐주세요(Pity the blind)'라는 글이 쓰였다. 그런데도 언니는 평온해 보인다. 가만히 빗물 스민 흙냄새를 맡고 있다. 왼손으로는 동생 손을, 오른손으로는 들풀을 매만지고 있다. 살포시 내려앉은 나비가 무언가를 속삭이려고 하는 듯도 하다. 쌍무지개는 볼 수 없지만, 어쩌면 그 이상의 세상을 느끼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무지개가 지면 두 소녀는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그곳은 낡은 웃옷, 몇 번은 꿰맨 듯한 찢긴 치마, 색 바랜 신발이 전부인 세상이다. 밀레이는 이번에도 집요한 연구를 통해 이 그림을 그렸다. 그 결과 사랑스럽지만 슬픈, 따뜻한 희망과 냉혹한 현실이 공존하는 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다.

은인의 아내와 결혼

존 에버렛 밀레이, '존 러스킨'


토머스 리치몬드, '에피 그레이'

밀레이는 차츰 자리를 잡았다. 이제 그에게 모욕을 주는 사람은 드물었다. 밀레이의 삶은 앞으로 무난하게 흘러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화가도 때때로는 자기 그림을 따라가는 걸까. 밀레이도 몰랐을 것이다. 그 또한 오필리아처럼 혼이 쏙 빠져, 원래라면 결코 안 할 선택을 할 것임을.

밀레이에게 러스킨은 은인이었다. 러스킨에게 밀레이는 기특한 동생이었다. 둘은 서로를 자기 집에 초대하는 등 사적으로도 친해졌다. 어느덧 밀레이와 러스킨, 러스킨의 아내 에피 그레이는 함께 여행을 갈 만큼 가까워졌다. 밀레이는 러스킨만큼 그레이에게도 호감을 느꼈다. 무엇보다 예뻤다. 풍성한 머릿결,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이었다. 아는 게 많고 성격도 명랑했다. 밀레이는 러스킨에게는 초상화를 그려주고, 그레이에게는 그림을 알려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에버렛 씨." 1853년의 어느 날, 그레이가 밀레이의 이름을 부르곤 한숨을 내쉬었다. 그레이는 남편과 밀레이의 이름이 똑같이 '존'이라는 점에서 그를 에버렛이라고 불렀다. 당시 밀레이는 그레이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죠? 백작 부인." 이건 밀레이가 그레이를 부르는 말이었다. 우아한 외모를 띄워주는 애칭이었다. "당신이 보기엔 저희 부부가 괜찮은 것 같은가요?" 그레이가 갑작스럽게 물었다. "음. 그게…." 당황한 밀레이는 말끝을 흐렸다. "사실은요. 러스킨과 저는 결혼하고 한 번도 잠자리를 갖지 않았어요. 그가 절 밀어냈거든요." "네?" "이유는 저도 잘 몰라요. 짐작 가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레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밀레이는 곧 울 것 같은 그녀에게 달려가 어깨를 감쌌다. 그레이는 아무 저항 없이 그에게 기대 몸을 떨었다. 밀레이는 그간 억누른 연정의 감정을 놔버렸다. 무려 은인의 배우자를 사랑하게 됐다. 그레이 또한 그런 밀레이가 싫지 않았다. 둘은 그렇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1854년, 법원은 러스킨과 그레이의 결혼을 무효로 했다. 그레이가 건 소송 결과였다. 그리고 1855년, 밀레이와 그레이는 결혼했다. 한때의 은인과 한때의 기특한 동생의 우정은 이번 일로 깨지고 말았다. 그 쯤 라파엘전파의 구성원들도 개별 활동에 나서는 등 사실상 해체됐다.


존 에버렛 밀레이, '성 아그네스의 전야'


존 에버렛 밀레이, 'Peace Concluded'

밀레이와 그레이는 성실하게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

밀레이가 그레이를 모델로 그린 대표작은 '성 아그네스의 전야'였다. 성 아그네스는 처녀들의 수호성인이다. 그녀를 기리는 이날 처녀가 특별한 의식을 하면 미래의 남편을 볼 수 있다는 미신이 있었다. 저녁을 먹지 않은 채 나체로 침대에 눕는다. 눈은 위를 향하고, 손은 베개 밑에 넣어둔다. 그러면 장래 남편이 꿈에 나온다는 설이었다. 밀레이는 그레이를 세워 그 의식을 준비하는 처녀로 그렸다. 그녀의 깊은 눈과 오뚝한 코, 가녀린 어깨와 볼륨감 있는 몸매를 부각했다. 그레이의 아름다움, 나아가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순수함을 강조한 작품이었다. 밀레이와 그레이 사이에선 자식이 8명이나 태어났다. 대가족을 등에 업은 밀레이는 차츰 더 대중적인 그림을 그렸다. "밀레이마저 돈을 위해 현실과 타협하고 있다"는 말이 있었지만, 그런 비판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래도 밀레이의 재능과 실력은 그대로였다. 이미 성공의 자리에 오른 그는 계속 승승장구했다. 그는 1885년 준 남작 작위를 받았다. 1896년에는 영국 왕립미술 아카데미 회장에 올랐다. 그리고 취임 6개월을 못 채운 채 같은 해 8월에 사망했다. "나는 캔버스 위에 쓸데없는 것을 의식적으로 그린 적이 없다." 이는 밀레이가 어린 시절부터 지켜온 말이었다. 그는 그렇게 해 삶과 신화, 문학 속 여러 장면을 그만의 기준으로 아름답게 풀어갈 수 있었다.

〈참고자료〉

햄릿, 윌리엄 셰익스피어, 민음사

존 러스킨 라파엘전파, 존 러스킨, 좁쌀한알

라파엘전파 회화와 19세기 영국문학, 손영희, 한국문화사

라파엘전파, 팀 베린저, 예경


〈후암동 미술관 현대미술 편 읽는 순서〉

1) “벌거벗은 女로 우릴 조롱” 욕이란 욕 다 먹었다[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최초의 모더니스트(모더니즘①) (2023. 6. 24.)

2)“11살 연하女와 비밀연애, 자식도 낳았다고?”…10년 숨겼다 ‘들통’[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현대미술 창시자(모더니즘②) (2023. 7. 1.)

3)“나체女에 웬 아프리카 가면?” 얼빠졌다 조롱당한 그의 ‘반전’[후암동 미술관-파블로 피카소 편] - 희대의 반항아(입체파) (2023. 5. 20.)

4)“무자비한 짐승男인 줄 알았는데” 쫙 빼입은 신사 등장, 모두 놀랐다[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행복의 야수(야수파) (2023. 8. 26.)

5)“내 이름은 로즈” 여장남자된 30대男 전말…‘빅픽처’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르셀 뒤샹 편] - 열정의 탐험가(레디메이드·개념미술) (2023. 6. 10.)

6)“외간여성과 시속 120km 광란의 음주질주” 즉사한 男정체 보니[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미국의 신화(액션페인팅) (2023. 7. 15.)

7)시뻘건 내 피와 교감해보겠나…울든, 기절하든 그대 마음[후암동 미술관-마크 로스코 편] -교감의 마술사(추상표현주의) (2023. 6. 17.)

8)“나나 네 엄마나 죽느냐 사느냐한다” 190㎝ 키다리 아저씨, 딸에게 한 고백[후암동 미술관-김환기 편] -붓을 든 시인(추상표현주의 특별편) (2023. 8. 19.)

9)“관음男-노출女가 만났네요” 조롱…둘은 ‘환상의 짝꿍’이었다[후암동 미술관-살바도르 달리 편] - 위대한 쇼맨(초현실주의) (2023. 7. 8.)

10)“여자랑 사느니 맹수랑 살겠다” 아내앞서 폭언…‘전쟁같은 사랑’을 한 부부[후암동 미술관-에드워드 호퍼 편] 고독의 화가(불모지) (2023. 8. 5.)

11)“난 고깃덩어리, 죽으면 시궁창에 던져버려” 폭탄발언…그는 ‘인간중독’이었다[후암동 미술관-프랜시스 베이컨 편] 고통의 화가(외딴섬) (2023. 7. 29.)

12)“죽일거야” 그녀가 쏜 3번째 총알이 몸 관통…죽다 살아났지만[후암동 미술관- 앤디 워홀 편] - 위대한 악동(팝아트) (2023. 6. 3.)

13)“흑인의 삶 어때?” 무례한 공격들…마돈나도 반한 27살男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장 미쉘 바스키아 편] - 자유의 반군(신표현주의) (2023. 5. 27.)

14)“엄마가 사라졌다, 속이 시원했다”던 그녀도 실종…1년뒤 ‘뜻밖’의 발견[후암동 미술관-아그네스 마틴 편] - 홀로 선 은둔자(미니멀리즘) (2023. 8. 12.)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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